초록의 시간 199 사랑에는 가시가 있다

영화 '야연'

by eunring

영화 '야연(夜宴)'은 중국판 햄릿이군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과 설정이 비슷합니다

그러나 영상과 대사는 아주 다르고

분위기와 감성 또한 다르죠


사랑과 음모와 복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나

장쯔이의 가시 돋친 아름다움을

가만가만 눈으로 스쳐봅니다

'햄릿'의 거투르드 왕비 역이라고 할 수 있는

황후 완이 영화 '야연'의 중심에 있어요


중국의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를 배경으로

태자 무란(오언조)의 깊고도 깊숙한

산속 대나무 숲 한복판 원형극장에서부터

영화 '야연'은 시작합니다

서로 사랑하던 완이 아버지의 여인이 된 후

상심한 태자 무란은 오월 지방으로 내려가

음악과 예술을 벗 삼아 은둔생활 중이죠


황제의 동생 리(길우)의 독에 황제가 죽자

황후 완은 새 황제 앞에 무릎을 꿇으며

황후의 자리를 지켜냅니다

'부황의 영혼이 황궁 밖을 배회한다고

자신의 눈을 똑바로 보라'는

태자 무란의 말에

'선황은 독전갈에 물려 돌아가셨다'며

황후 완은 이렇게 덧붙여요

'무란 아무것도 묻지 마

네 눈에 어린 슬픔으로 내 가슴이 미어져'


어린 시절 함께 연습하던 월여검으로

사랑과 미움이 어우러지듯 뒤섞인

검무를 추는 두 사람의 모습이

휘어질 듯 슬프고 아름답습니다

춤추듯이 허공을 나는 모습이

이루지 못한 사랑의 꿈인 듯 안타까워요


태자 무란이 칼로 새긴

'월인가' 두루마리를 펼치자

왕자와 뱃놀이를 하는 여인의

고독한 사랑 노래가 새겨져 있어요

태자 무란을 짝사랑하는

청녀(저우쉰)에게 불러주라는 완의 말에

'그녀는 이해 못해요

이해한다면 외롭지 않겠다'는

무란의 대답이 한없이 적막합니다


'배우는 가면을 쓰고 연기해야

자신의 희로애락이 표정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태자 무란은 말합니다

'위대한 예술가는 가장 복잡한 내면을

가면 안에서 연기하죠'

무란의 말에 대한 완의 대답은 비정해요

'가면 속 네 얼굴에 다 보인다

훌륭한 배우는 자신의 얼굴을

가면으로 바꾸어야 해'


'산에는 나무가 있고

나무에는 가지가 있네

님이 있어 기쁘나 님은 알지 못하네'

'월인가' 그림 속 홀로 노 젓는 여인이

가엽다는 청녀의 말에

'너와 황후는 나를 동정하며

내 가련함을 미끼로 나를 안으려 한다'고

무란은 대답합니다

자신의 외로움을 채울 수 없고

서로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도 없는

무란과 청녀 두 사람의

엇갈린 사랑도 안타깝습니다


완 황후의 책봉식 날

빨강 옷의 황후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태자 무란은 숙부가 아버지를 독살하는

장면을 공연하고 박수를 받지만

가면을 벗자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입니다


눈물을 닦아주려는 숙부의 손을 거절한 무란을

황제는 거란에 인질로 보내라 명을 내리고

태자와 함께 가서 외로울 때

노래를 불러주겠노라고 나섰다가

청녀는 황후에게 매를 맞아요


태자 무란이 거란으로 떠난 후

황후가 그녀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왜 때렸는지 아느냐 묻자

질투 때문이라고 청녀는 대답하죠

자신에겐 사랑이 있지만

황후는 자신만을 사랑한다는

청녀의 대답이 옳긴 해요


티없이 맑고 순수한 사랑이지만

그러나 혼자 하는 청녀의 사랑은

외롭고 적막할 뿐입니다

태자 무란의 마음속에는 청녀가 없으니

그녀의 사랑은 서글픈 그림자 사랑인 거죠


황후 완은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서슴없이 독을 사러 갑니다

모질지 못한 태자 무란이 두고 간 독을

손에 쥔 황후는 독을 파는 이에게

죽으라 비상까지 건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독이 무어냐고 묻는

태자 무란에게 독전갈보다 더 무서운 독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독을 파는 이가 말했었죠

독을 만드는 그 역시 독으로 죽어요


복수가 용암처럼 꿈틀거리는 밤의 연회에서

황후가 건네는 독이 든 술잔을

황제가 받아 마시려는 순간

계획에 없는 '월인가'를 공연하겠다고 나서는 청녀에게 황제는 상이라며 독이 든 술잔을 넘기죠


'오늘 밤은 어떠한 밤인가

배를 저으며 강 위를 떠도네

오늘은 무슨 날인가

왕자와 함께 배에 오르네

사모하는 이 마음이 부끄럽지만

사람들이 비웃어도 개의치 않네

마음속 번뇌가 끊이지 않으니

왕자의 마음을 알고 싶을 뿐이네'


독인 줄도 모르고 황제가 건넨

한 모금 독에 중독된 청녀가 부르는

'월인가'는 한없이 고즈넉하고

애절하게 이어집니다


"산에서 나무가 자라고

나무에서 가지가 돋듯이

그대를 향한 내 사랑은 깊어만 가는데

그대 내 마음을 모르네'


독에 중독된 채 간신히 노래를 마치고

무란의 품에 안겨 죽어가며 청녀가 물어요

'아직도 외로우세요?'

'네가 있으니 외롭지 않다'

죽어가는 청녀에게는 위안이 되겠으나

죽어서 외로움을 채울 수 있는 사랑은

너무도 가혹하고 구슬픈 사랑입니다


'내 마음속에 네가 있으니

누구도 널 헤칠 수 없다'

누이동생 청녀를 안고 우는

오빠 준의 모습도 절절해요


'당신이 독을 넣었소?

짐은 아직 황후의 마음을 녹이는 중이오'

절대권력을 지닌 황제도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할 뿐이고

핏빛으로 물드는 밤의 연회는 계속되죠


'네 울적함이 여인들의 마음을 흔들었느냐

순수한 마음이 온갖 계책 보다 나을 수 있다며

태자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피가 필요하다면

선황의 존엄을 돌려주겠다'고

독이 든 술을 마시는 새 황제 리는

황후 완을 향한 명대사를 건넵니다


'내 어찌 당신이 주는 독을 거절하겠소'

황후 완의 품에 쓰러지는 새 황제 리에게

사랑이 뭐냐고 묻고 싶어요

사랑이 뭐길래 사랑을 위해 죽고

또 죽여야 하는 거냐고~


부질없는 욕망과 복수의 끄트머리에서

묵묵히 기다리는 건 허무뿐이죠

죽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무란을 안고

빨강 옷의 황후 완은 여황제가 되지만

'완이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잊혔을까'

중얼거리며 완은 씁쓸히 웃을 뿐~


붉은색을 좋아하는 이유는

인간의 타오르는 욕망 같아서라고

붉은 옷감을 와락 끌어안으며

등에 칼을 맞고 쓰러지는

여황제 완의 가녀린 어깨 위로

하얀 눈송이들이 슬픔의 꽃 이파리처럼 흩어지고

허망한 그녀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주는 건

핏빛으로 처연하게 흐르는 엔딩곡뿐입니다


'노래 한 곡을 만들려고

외로움을 피로 물들였네

사랑을 다해 보답했지만

그대는 돌아오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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