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212 고요한 슬픔의 빛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by eunring

한 폭의 그림 같은 영화는

눈부신 햇살을 머금고 있어요

빛의 은은함이 고즈넉하고 아름답게

고요하고 찬란한 슬픔 한 줌을

살며시 건네는 듯해요


그림에서 피어난 상상이 소설이 되고

소설에서 영화가 된 '진주 귀고리 소녀'는

장면 하나하나가 유화 같아요

햇살이 분위기를 만들고

손짓이 사랑을 원하고

눈빛이 안타까움을 속삭이며

다 채워지지 않고 빈 듯한 자리에

많은 이야기가 숨죽이며 깃들어 있어요


말하지 않아도 들려오는

사랑의 안타까움과 애틋한 그리움이

부드럽고 투명한 빛과 함께

짙푸른 그림자로 젖어듭니다


'진주 귀고리 소녀'는

'북유럽의 모나리자'라고 부른다죠

어둡고 단순한 배경을 등에 지고 있는

소녀의 표정이 모나리자를 닮았기 때문이래요

화가인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좋아했다는

파랑과 노랑의 차분한 조화가

묵묵히 아름답습니다


푸른색 터번을 두르고

노랑 천을 내려뜨린 채

놀란 듯 보이는 순수한 눈망울과

할 말이 있는 듯한 신비로운 표정으로

성큼 다가오는 소녀의 귀에서 달랑이는

진주 귀고리의 영롱한 빛이

사랑스러운 소녀를 더욱 신비롭게 합니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는

고요의 화가라 불린답니다

빛과 색을 조화롭게 담은 고요한 실내 풍경과

차분한 일상을 주로 그렸기 때문이래요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

'진주 귀고리 소녀'인데요

그림 속 소녀를 바라보면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짙푸른 상상의 날개를 펼치며 떠올라요

상상 속 이야기들이 소설이 되고

그림 속 색감을 닮은 영화로도 만들어진 거죠


그리트(스칼렛 요한슨)를 짝사랑하는

순수청년 피터(킬리언 머피)가 그리트에게

미소 한 번 보여달라고 하는 장면에서

그녀가 보여주지 않는 미소를

외상장부에 적어두겠다고 하죠

'그리트의 미소 한 번'은

모나리자의 미소처럼 신비롭고

매혹적이고 사랑스럽습니다


스칼렛 요한슨이

그리트 역으로 잘 어울립니다

하얀 두건을 쓴 그녀의 순수한 매력이

매혹적인 눈빛과 미소의 끄트머리에서

고요한 햇살을 받아 일렁이고

절제된 장면과 표현과 감정들이 건네는

잔잔한 흔들림이 깊은 여운으로 다가옵니다


네덜란드 델프트가 배경이죠

도자기 예술가인 아버지가 시력을 잃어

그리트가 가족을 보살피기 위해

화가 베르메르의 집에 하녀로 들어옵니다

주인과 하녀로 시작했으나

예술적 감각을 지닌 그리트는

베르메르의 작업실에서

화가의 작업을 돕다가 모델이 되고

고요한 열정과 순수한 사랑으로

베르메르의 뮤즈가 되죠


베르메르의 아내 카타리나(에시 데이비스)가

하녀 그리트에게 작업실 청소를 맡기자

그리트는 유리창문을 닦아도 되는지 묻습니다

빛이 바뀌는 것이 괜찮으냐고 묻고

유리창문을 닦을 때 햇빛이 들어와 빛나는 그리트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은 베르메르는

'물주전자를 든 여인'을 그리게 되죠


청소를 할 때도 그리트는

물건의 위치를 바꾸지 않고

조심스럽게 움직여요

그리트의 타고난 예술적 감각과

깊은 감성을 알게 된 베르메르는

물감을 섞는 등 잔심부름을 맡기게 됩니다

당시 파란색 물감은 금값보다 비쌌다고 하니

잔심부름이 아니라

그리트를 믿고 맡긴 것이죠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작업실에서

예술적 교감을 나누고 공유하는

주인이며 화가인 베르메르와

하녀지만 예술을 이해하는 그리트

화가와 모델이기도 한 두 사람 사이를

예민한 카타리나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죠


팔레트 위에 파랑 물감을 짜서 뭉개는 그녀에게

베르메르가 의자를 옮긴 이유를 묻자

갇힌 같아서라고 대답하는 그리트의 손과 베르메르의 손이 맞닿을 듯한 순간

그 손끝의 떨림을 알아채기라도 하듯이

귀갑 빗이 없어졌다고 카타리나가 소리칩니다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도와주세요'

입술을 들썩이며 베르메르를 바라보는

그리트의 눈빛이 애처롭고

구석구석 뒤집어 빗을 찾아내는

베르메르의 모습이

소리도 없이 격정적입니다


카타리나는 끊임없이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하고

딸 코넬리아는 그리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지만

후원자 반 라이벤(톰 윌킨슨)을 초대해서

그림 의뢰를 받아내는 장모 마리아(주디 파핏)

그리트에게서 영감을 받는 베르메르에게

딸 카타리나의 진주 귀고리를 몰래 빌려줍니다


그리트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후원자 반 라이덴과 함께 그리지 않고

그리트를 따로 그리기 위해 베르메르는

그리트의 두건 앞을 접으라고 하는데

하얀 두건에 쏟아지는 햇살이 왠지 아파요


두건을 벗으라는 베르메르에게

그리트는 안된다고 하지만

얼굴선이 안 보인다는 말에 두건을 벗고

부드럽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드러내는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도

아픔의 햇살이 스며들어요


늘 머리를 가리고 있던 하얀 두건 대신

푸른색과 아이보리색 천으로 머리를 감싸는

그리트는 아름답습니다

구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리트의 귀를 뚫어 진주 귀고리를 해주는

베르메르의 손끝에서 전해진 아픔이

그녀를 눈물짓게 합니다

사랑은 아픈 거니까요

이룰 수 없는 사랑은

소리도 없이 아프니까요


귀를 뚫고 귀고리를 해주는 장면이

슬프고도 아름다워요

진주 귀고리는 그녀의 귀에 매 달리고

그녀의 눈에서는 진주 방울 같은

눈물이 또로록 흘러내립니다


완성된 그림을 보여주자

그리트가 중얼거립니다

'제 마음을 읽으셨군요'


더는 감추지 말라고

그림을 보겠다고 고집하는 카타리나에게

그림은 그림일 뿐 아무 의미 없다고 하지만

그림을 보여주자 카타리나는

단번에 그림을 읽어냅니다

울음을 눌러 참으며 외설적이라고 하죠


나가라는 카타리나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아무 말 없이 천천히 걸어 나가는

그리트의 발자국 소리까지도 애처로이

또박또박 그에게서 멀어집니다


변명 한 마디 없이

갇힌 사랑으로부터 떠나가는

차분한 그리트의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카메라의 시선이

화가 베르메르눈길처럼 쓸쓸합니다


장면이 정지하면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되고

배우들의 눈빛과 표정이

대사의 빈자리를 대신하며

상상의 즐거움과 함께 아픔을 건넵니다


하녀가 그리트를 찾아와 네 것이라고 건네는

푸른빛 천에 싸인 진주 귀고리의 영롱함까지도

방울방울 고요한 슬픔 같아요

진주 귀고리에 머무르는

햇살의 고요한 눈부심까지도 사랑이고

또한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쓸쓸한 아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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