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239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

영화 '남과 여:여전히 찬란한'

by eunring

'생애 최고의 날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다'

빅토르 위고의 말로 시작하는

영화 '남과 여:여전히 찬란한'은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고 행복한 시절을

꿈같은 회상으로 보여줍니다


세월이 흘러 기억은 지워지고

얼굴은 희미해져도 사랑은 남아

아름다운 회상의 꿈결로 흐르죠

그러므로 여전히 찬란한 인생입니다


영화 속 주인공 루이는

습관처럼 베를렌의 시를 읊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윌리엄 워즈워드의

'초원의 빛' 시구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


'한때 그토록 찬란했던 빛이

지금 눈앞에서 사라진다 한들 어떠리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해도

슬퍼하거나 탄식하지 않으리

차라리 남겨진 것들 안에서

새로운 힘을 찾으리'


여전히 찬란한 그들의 이야기는

장 루이 역의 장 루이 트린티냥과

안느를 연기하는 아누크 에메가

기차역에서 이별한 후 54년 만에 다시 만나

연인인 듯 연인 아닌 연인 같은

달콤 씁쓸한 시간을 보내는 이야기랍니다


두 주연 배우는 1966년 '남과 여'

1986년 '남과 여:20년 후'에 이어

2019년 '남과 여:여전히 찬란한'까지

'남과 여' 시리즈의 주연을 계속 맡았다죠

나이 들어도 한결같이 멋진 남녀 배우가

여전히 찬란한 '남과 여'를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죽은 남편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안느와

카레이서 장 루이의 사랑과 안타까운 이별

그 후 54년이 지나 다시 만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달콤 쌉싸래하고

애틋하고 안쓰럽고 애잔합니다


딸이 살고 있는 노르망디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평범한 나날을 보내던 안느는

지난 추억 속의 이루지 못한 사랑

장 루이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세계적인 카레이서였던

까칠 할아버지 장 루이는

치매에 걸려 요양병원에서 지내며

폴 베를렌의 시를 줄줄이 외우거나

눈부신 햇살 아래 휠체어를 타고

홀로 멍 때리며 지내고 있어요


지난 모든 기억을 잊고

아들 앙트완의 도움으로 다시 만난

바로 눈앞의 안느도 알아보지 못하지만

그녀를 사랑했던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

눈앞의 안느에게 누구냐고 물어가며

추억 속의 안느 이야기를 해 줍니다


파리행 기차를 놓친 안느를 태우고 가며

헤어짐이 아쉬워 천천히 자동차를 몰았던

카레이서 루이는 자신을 찾아온 안느에게

기억 속 선명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죠

아름다운 목소리가 사랑하는 그녀를 닮았다고

손으로 머리를 넘기는 모습이 그녀를 닮았다고

참 예쁘다며 자꾸만 또 해보라고 부탁해요

자신이 사랑했던 그녀 안느에게

기억 속 그녀 안느의 이야기를 합니다


루이와 안느 두 사람의 찬란했던 젊은 시절은

안타까운 사랑의 흔적과도 같은

흑백의 회상 장면으로 보여주는데요

안느가 보낸 전보를 받고

밤새 안느를 만나러 가는 루이

그리고 두 사람의 애절한 만남을

흑백으로 아름답게 되살려 보여줍니다


'당신에게는 아들이 있었고

내게는 딸이 있었다'고 안느가 말하자

'새벽 5시 간호사가 자리를 비울 때 탈출하겠다'며

함께 가자는 루이의 말이 진심인 듯 진지해요

안느가 가게 때문에 안 된다고 하자

가게는 왜냐고 묻고 삶의 일부라는 대답에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어~라는 루이의 말에도

진심이 담긴 듯 먹먹합니다


오십 년 동안 간직했다는

그녀 안느의 사진을 보여주며

안느 이야기를 더 해주고 싶다는 루이에게

사진을 봐서 됐다는 안느는

여전히 기품 있고 우아합니다


정작 어제 일은 기억하지 못하면서

지난 일은 분명하고 뚜렷하다며

그녀를 닮았다고 곧 또 보자고

루이는 연거푸 말하고

안느는 웃으며 귀 기울입니다


시간이 가는 걸 잊지 않으려고

위대한 탈출을 위해 새벽 네시에

알람을 맞춘다고 내일 만나자며

뛰고 걷다가 이제는 기어 다닌다고 중얼거리는

휠체어에 앉은 루이의 모습을 보며

너무 긴 시간을 잃어버린 그가 안쓰럽고

마음 아프다고 안느는 안타까워하죠


'남과 여' 주제곡이 흐르는 회상 장면에서

루이는 기억하는 대신 꿈을 꿉니다

'근데 누구세요?'

눈앞의 안느에게 누구냐고 물으며

왜 나보다 젊어 보이냐고 물어요

화장을 더해서 그런가 보다고 안느가 대답하자

온화해서~라는 루이의 마음속이 궁금합니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듯하다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표정과 눈빛의 깊이를 도무지 알 수 없어요


어디 가고 싶냐 물으면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고 싶다며

폴 베를렌의 시를 읊어줍니다

베를렌을 기억하면서

난 기억 못 하느냐고 안느가 묻자

베를렌을 더 자주 보니까~라는

루이의 대답이 적막하고 쓸쓸합니다


같이 살진 못했지만

같이 죽는 건 어떠냐 묻다가

안느를 지그시 바라보는

루이의 회상이 꿈으로 이어지면서

그녀와의 약속에 늦지 않으려고

새벽의 파리를 질주하는 루이는

당시 속도광이어서 더 빨리 달려야 했다며

'그토록 사랑해서 시간은 아쉽네'

흑백 영상 위로 엔딩곡이 흐릅니다


달리는 자동차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파리 시내의 풍경이 애잔한 것은

음악 때문이거나 혹은 추억 때문이거나

또는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들이 있고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게 되리라는

애잔함과 안쓰러움 때문인 거죠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회상하고 꿈꿀 수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할까요?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이 있으니

남겨진 시간 안에서 힘을 찾아야겠죠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 아래 더 새롭고

더욱 힘찬 꿈을 꾸어야 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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