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238 그녀의 행복 일기
영화 '파 프롬 헤븐'
주인공 캐시를 연기하는
줄리안 무어의 절제된 연기에 반합니다
행복이라고 믿었던 순간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모조리 흩어져 사라지더라도
그녀는 슬픔을 과장하지 않습니다
인종 차별과 사회적 편견이 심하던 시절
50년대 미국 코네티컷을 배경으로
자상한 남편과 사랑스러운 두 아이와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려나가며 이웃과도 잘 지내는 그녀의 행복은 어느 날 문득 소리도 없이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도시락을 싸 들고 갔다가 우연히 마주치게 된
남편 프랭크(데니스 퀘이드)의 비밀과
믿어지지 않는 뜻밖의 고백으로
그녀의 단정하고 평온한 일상에
매서운 폭풍이 휘몰아치지만
아파도 소란스럽지 않고
슬퍼도 유난하지 않은 그녀의 모습이
차분해서 더 안쓰럽습니다
흑인 정원사 레이몬드 역의
데니스 헤이스버트의 푸근함에 기대어
혼란스러운 마음을 달래며
천국보다 먼 사랑과 우정에 빠져드는데
그녀의 차분하고 단정한 슬픔을 다독이는
우아하고 서정적인 가을 풍경이
아름다운 수채화 같아요
영상과 색감의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그래서 더욱 안타깝습니다
1955년 더글라스 샤크 감독의
상류층 부인과 정원사의 사랑을 그린
'순정에 맺은 사랑'을 재해석한 영화
2003년 토드 헤인즈 감독의 '파 프롬 헤븐'에는
남편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알게 된 캐시가
흑인 정원사(데니스 헤이스비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으며
이해와 공감이라는 선물을 나누게 되지만
그들을 향한 주변의 시선은 차갑기만 합니다
절친 엘리노어(패트리시아 클락슨)까지도
캐시가 레이몬드를 향한 마음을 고백하자
돌아서는 표정이 싸늘하기만 해요
백인 여자 친구 캐시와 어울리는
레이몬드 역시 주변의 비난을 받게 되고
흑인이라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레이몬드의 딸 사라의 소식을 듣고
캐시가 위로하기 위해 찾아가자
뒤쪽으로 가서 이야기하자는 레이몬드는
우리에게 허락된 공간은 여기뿐이라며
세라를 위해 볼티모어로 떠난다고
당당하게 살라고 캐시에게 말합니다
레이몬드에게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캐시를 향한 레이몬드의 부탁은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고 멋진 인생을 살기 바래요'
당당함과 아름다움이라는 말까지도
애틋하게 들려오는 건 왜일까요?
기차역에서 그들은 헤어집니다
보러 갈 수도 있다고 캐시는 말하지만
레이몬드는 다만 웃으며 손을 흔들 뿐
그렇게 서로를 위해 서로를 놓아줍니다
"그대 마음 가는 곳에 인생의 빛이 있다'고
레이몬드는 말했으나 마음 가는 대로
만나러 갈 수 있을까요?
천국보다 먼 길인데요
어쩌면 은발의 나이가 되어
우연히 스쳐 지나갈 수는 있겠죠
그들의 사랑과 우정은
천국보다 먼 사랑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