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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ring Sep 09. 2024

초록의 시간 843 열일곱 송이 장미

영화 '진저 앤 로사'

진저와 로사

1945년 런던의 병원에서

두 소녀가 함께 태어납니다

진저(엘르 패닝)와 로사(앨리스 잉글러트)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단짝 친구가 되죠


로사의 진한 갈색 곱슬머리를

다림질판 위에 길게 펴서 올려놓고

조심스럽게 다리미로 다려서  주는

진저의 심각한 모습

그리고 다림질판 위에

넙죽 엎드려 머리를 맡긴 로사

두 소녀의 모습이 진지하고

감성적이고 감각적인데

푸훗 웃음이 나는 건 왜일까요?


함께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욕조에서 청바지의 물을 빼기도 하고

턴테이블에 음반을 올려 재즈를 들으며

엄마 옷을 입어보는 로사를 가만 지켜보다가

둘이 똑같은 옷을 쌍둥이처럼 갈아입고

핵무기폐기 집회에 가는 진저와 로사는

반핵운동도 거침없이 앞장섭니다


일찍 집에 들어와서

집안일 거들라는 엄마들의 잔소리에

세상이 끝날지도 모르는데~라며 투덜대는

두 소녀의 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아요

누구에게나 흥칫뿡 삐딱선 타는

철부지 시절이 분명 있었을 테니까요


누구나 십 대 시절의 엉뚱하고도

깊이 심각하고 어설프고 위태로운 길목을

서툰 걸음으로 스쳐지나 지금에 이르렀죠

열일곱 송이 장미처럼 곱고 향기로운

시간 속을 헤매고 서성이며

성장하고 성숙했으니까요


1960년대를 살아가는 두 소녀 

열일곱 살 진저와 로사

꿈과 음악은 물론이고

패션과 헤어 스타일까지

모든 것을 의지하고 공유하며

서로를 소울메이트로 생각하지만

두 소녀는 달라도 한참 다릅니다


재즈가 흐르는 1962년 런던은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인해

전쟁의 불안까지 겹쳐 혼란스러웠죠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향해 발돋움하며

혼란과 갈등을 겪는 두 소녀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섬세하게 그려낸 

영화 '진저 앤 로사'


세상을 걱정하며 행동하는 소녀

진저를 연기하는 엘르 패닝 예쁘고

연기도 깊고 진지해요

웃는 모습이 눈부시게 사랑스럽죠

고민하고 갈등하고 침묵하고 우는

눈빛과 표정까지도

섬세하게 아름답습니다


십자가 목걸이를 보고

신은 지어낸 얘기라는 아빠

자주적 사고가 중요하다며

사후세계는 미신이니

현재를 살라고 하죠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철학적 성향의 진저는

그림을 그리고 시도 쓰는 소녀입니다

1962년 쿠바의 미사일 사태를 보며

핵전쟁에 대한 공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몹시 혼란스러워합니다


진저는 엄마처럼 살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야무지고 당돌한 소녀이기도 해요

달걀 하나 삶을 줄 모르던 십 대에

임신을 하고 진저를 낳아 키우느라

화가의 꿈을 접고 주저앉아버린

엄마 나탈리(크리스티나 헨드릭스)처럼

무력하게 살지 않으리라 다짐합니다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죽고 싶지 않다는 진저에게

소녀로 살 수 있는 시간은 짧고

순식간에 어른이 될 거라고 위로하는

대부님 마크와 벨라는 친절한 어른입니다


진저는 애칭인데요

진저라는 이름은

아프리카 활동가로 적절한 이름이라고

벨라가 격려하고 응원합니다


로사는 청소 일을 하는 엄마와 살며

어릴 적 가족곁을 떠난 아버지의

빈자리에서 느끼는 상처와 외로움을

거울 앞에서 엄마의 옷을 입어보다가

가슴의 단추를 열어젖히기도 하며

솔직한 감정으로 사랑을 쫓는 소녀입니다


진저의 아빠 롤랜드의

감상주의와 평화주의에 스며들고

편지도 하고 답장을 하기도 하


신념을 부르짖으며

주체성을 말하다가도

가끔씩 자기 연민에 빠져드는

진저의 아빠 롤랜드(알렉산드로 니볼라)

 진저에게 아빠라고 불리는 것보다

롤랜드라고 친구처럼 불리기를 좋아하는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파이를 만들어주는 아내 나탈리에게

고맙다는 말을 안 해서 다투고는

감정적 협박이라고 중얼중얼

슈베르트의 '네 손을 위한 환상곡'을 들으며

소년 감상에 빠져들곤 합니다


엄마가 자신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진저는

엄마집에서 떠나 아빠집으로 갑니다

턴테이블에 재즈 음반을 걸고

함께 듣는 부녀의 모습은 다정하고

로사와 함께 셋이서 

작은 요트를 타기도 해요


로사는 롤랜드와 나란히 앉고

은빛 물살을 손으로 스치는 진저는 

아빠 롤랜드와 친구 로사의

부적절한 관계를 이미 알고 있으니

그 상처가 깊을 테죠


진저가 반핵 집회에 참석하는 사이

로사는 웨이브 진 머리에 화장을 하고

레스토랑으로 향합니다

두 사람의 선택은 그렇게 달라집니다

로사에게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말하

아빠를 보며 눈물 흘리는 진저의

상처는 점점 더 깊어집니다


진저는 아빠와 로사와의 관계 때문에

격한 혼란의 소용돌이빠져드는데

로사는 진저의 엄마 나탈리처럼

머리 모양까지 바꾸고

자신의 사랑도 가치 있다고

진저를 고통에 빠뜨립니다


아빠의 빈자리를

친구 아빠의 사랑으로 채우며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로사는 

감정적으로 상처 입은

롤랜드를 도울 수 있다고 해요

둘은 공통점이 많다고 확신하죠


일이 좀 복잡하게 되었다고

아빠는 변명합니다 

스스로 아빠 소질이 없다며

느닷없이 고해성사라도 하듯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사이렌의 부름처럼 누구도 비켜갈 수 없다고 로사와의 사랑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고는

엄마에게는  절대 비밀이라는

옹색한 모습을 보입니다


나는 한 남자를 구할 테니

넌 세상을 구해~

진저처럼 세상을 구할 순 없으니

한 사람에게 전념하겠다는

로사의 임신소식에 진저는

집회현장으로 달려가고 

마침내 구치소에 갇히게 됩니다


진저는 엄마에게

아빠와 로사의 관계를 폭로하고

진저의 엄마는 자살을 시도하다가

병원으로 실려갑니다


병원으로 찾아온 로사가

용서를 빌자 말없이 스쳐 지나가지만

병원에서 엄마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진저는 로사에게 편지를 씁니다

아빠가 묻자 미래에 관한 시라고 하죠


'이제 우리에게 내일은 없을지 몰라

그런 공포와 슬픔 속에서도

난 이 세상을 사랑해

모두가 살았으면 좋겠어


로사 넌 내게 용서를 구했지

엄마가 이 혹독한 밤을 지내고 나면

우리도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널 사랑했다고 말할게


넌 변치 않는 사랑을 원하지만 난 달라

진짜 중요한 건 이렇게 사는 거야

우린 서로 다르지만 중요한 건

우리가 살아있다는 거야

우리가 살아나게 되면

널 용서할게'


용서가 가장 큰 사랑임을

진저는 알고 있어요

미안하다는 아빠 롤랜드를 등지고

용서를 다짐합니다

'어쨌든 난 용서할 거야'


열일곱 소녀 진저의 용서는

열일곱 송이 장미처럼

싱그럽고 아름답습니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죠

그리고 중요한 건 진저의 말처럼

이렇게 살아있다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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