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250 이별 후의 빈자리

영화 '우리가 이별 뒤에 알게 되는 것들'

by eunring

한 남자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어쩌다 함께 살게 된 네 여자라는 설정이

흥미롭고 독특합니다

막장은 막장인데 요란스럽지 않아요

섬세하고 차분한 심리 묘사와

아름다운 영상 덕분에

고급진 막장 드라마 같은 느낌입니다


한 남자와 이별한 뒤에

네 사람이 알게 되는 것들은

같거나 비슷하기도 하고 전혀 다르기도 해요

그 남자와의 관계가 서로 다르니까요


한 남자로 인해 인연을 맺은

두 엄마와 두 딸의 사랑과 이별이

갈등과 혼란의 폭풍우가 되어 몰아치고

어우러져 머무르고 외면하기도 하다가

다시 휘몰아치는 과정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이해와 공감을 주고받기도 하며

서로를 다독이고 상처를 치유합니다


섬세하고 예민하고 복잡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격한 소용돌이를 만나게 되고

소용돌이를 헤쳐나가는 과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네 사람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만나게 된

두 엄마와 두 딸입니다


남편과 이혼 후 딸과 살다가

갑작스럽게 전 남편의 죽음을

남편의 현재 아내 레이첼로부터 전해 듣고

혼란에 빠지는 케미(헤더 그레이엄)

남편의 죽음으로 오갈 데 없이 난처해진

레이첼(조디 발포어)과 딸 털룰라에게

집에 들어와 함께 살자고 합니다

정원에 놓여 있는 캠핑카에

레이첼 모녀는 머무르게 되죠


욕조에서 심장마비로 익사했다는

갑작스러운 아빠의 죽음도 버거운데

레이첼 모녀를 집으로 들인

엄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 된

십 대 딸 애스터(소피 넬리스)와

레이첼의 철부지 어린 딸

털룰라(애비게일 프니오브스키)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이 나서 엄마와 자신을 버리고 간

아빠를 미워하는 애스터와 달리

아빠를 그리워하는 털룰라는

캠핑카가 감옥이라며

그림동화 작가인 캐미와 잘 지냅니다


가족인 듯 가족 아닌 가족 같은

캐미와 애스터와 털룰라가

함께 마트에 장을 보러 간 사이에

빈집에 들어와 구석구석 둘러보는

레이첼의 표정이 복잡 미묘합니다


'난장판을 만들고 떠나 줘서

눈물 나게 고맙네요'

죽은 아빠에게 문자 하는 애스터와

캠핑카 안에서 멍하니 문만 바라보는 레이철은

서로 삐걱대면서도 어느 순간

마음이 통하는 사이가 되죠


책 마감이 코앞이라 바쁘면서도

'물에 빠져 죽는데 몇 분 걸릴까요?'

털룰라의 엉뚱 질문에 웃으며

수영하는 모습을 지켜봐 주는 캐미

두 사람 사이도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어린 철부지 털룰라는

수영장이 있는 큰 집에서

여럿이 모여 함께 사는 것이

즐거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죽은 남편의 전처와 함께 살고 있는 레이철과 전처의 딸인 애스터는

어색하고 불편한 사이지만

두 사람은 함께 볼링을 치며

속 깊은 얘기를 나누기도 해요

절친의 남자 친구와 사귀는 애스터가

불륜이 어땠다고 묻자

레이첼은 기분이 엉망이었다고 하죠


털룰라의 생일파티 계획도 세우지만

불륜이 나쁘다는 소란 끝에

레이첼이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합니다

'최악인 것은 이곳이 점점 집처럼 느껴진다'며

짐을 챙겨 모텔로 가는 레이첼의 심정이 애잔하고

모텔 화장실에서 우는 엄마에게 말없이

이어폰을 끼워주는 털룰라의 모습이

측은하고 안쓰러워요


다시 모여 털룰라의 생일파티를 하는데

애써 만든 캐미의 요리 대신

마트용 케이크를 먹는 레이첼과 털룰라는

마구 삐뚫어질 테다~작정한 것 같아요


죽은 남편이 전처인 캐미와

다시 만났다는 것을 레이첼이 알게 된 거죠

세탁물 속 엄마의 야한 속옷이

집 나간 아빠 때문이었다는 것에

애스터도 어이상실~

엄마가 이혼한 아빠의 내연녀가 된 셈이니까요


아빠의 불륜에 대해

엄마들끼리 얘기한다며 두 딸을 내보낸

캐미와 레이첼 두 여자는 속마음을 꺼내 놓으며

다 지난 일이니 털어버리자고 합니다

불륜의 중심에 있던 남자가 곁에 없으니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없긴 합니다


애스터와 털룰라 자매도

아빠의 기억 속에 잠시 머무릅니다

집 떠난 아빠가 만나러 올 때마다

함께 왔다는 놀이공원에서

애스터는 털룰라와 햄버거를 먹으며

'아빠는 내가 여기를 좋아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몹시 어색했다'고 털어놓아요


아빠의 유골 상자를 가방에서 꺼내는 털룰라에게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애스터는 말해요

당분간은 믿고 싶지 않다는 털룰라와 함께

애스터는 아빠를 놓아 보내기로 합니다


바닷가로 간 애스터와 털룰라는

욕조에서 익사한 아빠를

차마 바닷물에 놓아줄 수 없어

아빠가 좋아한 것들을 생각하다가

애스터가 운전하는 차의 창문을 열고

털룰라가 바람에 아빠를 한 줌씩 놓아줍니다


울 듯 말 듯한 털룰라의 표정과

사이드미러에 비치는

애스터의 표정이 가슴 먹먹합니다

털룰라가 아빠에 대한 그리움을

바람에 날려 보내는 동안

애스터는 아빠에 대한 미움도 함께

훌훌 놓아 보내는 거죠


캐나다 출신의 아이스링 친-이 감독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여성들이 서로의 인생에 방향을 제시하며

진정한 지지를 보내는 모습을 담아내려 했다

인생의 혼란을 겪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들의 능력과 회복력을 보여주는

영화가 되기를 바란다'


레이첼 모녀가 떠난 후

훌훌 옷을 벗고

수영장 물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캐미의 미소가 쓸쓸해 보이는 것은

레이첼과 털룰라의 빈자리 때문이겠죠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아는 거니까요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별 후의

번잡한 시간을 함께 했다가 떠나고 남으며

그렇게 그들은 한 남자를 바람결에 놓아줍니다

두 엄마와 두 딸도 남편이고 아빠였던

한 남자에게서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거죠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어쩌면

외로움에 익숙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상처의 흔적 위로 그리움이 쌓이며

그리움 또한 익숙해질 테죠


그동안 몰랐던 씁쓸한 이야기들이

느닷없이 밀려들었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이별 후의 빈자리에 금싸라기 같은

지난 기억들이 함께 하겠죠


두 엄마와 두 딸

한 남자로 인해 만났다가

다시 헤어진 네 사람이

쓰라린 기억은 바람에 날려 보내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었던

따사로운 기억만 남겨두기를

저마다의 자리에서

외로운 만큼 자유롭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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