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257 지워지지 않는 눈빛

영화 '흔적 없는 삶'

by eunring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서랍을 정리하고 옷장을 정리하듯

지나온 시간들을 지우개로 말끔히 지우고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어떨까~


필요한 것만 곁에 두고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내다 버릴 수 있다면

마음에 드는 좋은 것들만 남겨 두고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은 살살 밀어낼 수 있다면

지난 시간 속 철부지 나를

살짝 지울 수 있다면~


그러나 우리 삶에 만약이란 없는 거죠

마음에 안 들어도 없는 셈 칠 수는 없는 거죠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고

돌아볼 수는 있어도 내다 버릴 수는 없는 거죠


지워지지도 않고

채워지지도 않는 우리 삶과도 비슷한

'흔적 없는 삶'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와서 보기 시작합니다

원제는 '흔적 없는 떠남'이랍니다

아빠와 딸의 삶과 사랑이 애틋해서

중간에 채널을 돌리지 못합니다


흔적 없이 살다가

흔적 없이 떠나고 싶은 아빠 윌(벤 포스터)은

10대 소녀인 딸 톰(토마신 멕켄지)과 함께

깊은 산속에서 몇 년째 숨어 지냅니다

제대로 된 집도 없이 천막을 치고

빗물을 받아 식수로 사용하고

버섯을 따서 먹기도 하며

마트에서 먹거리와 생필품을

가끔씩 사 오기도 해요


참전 군인이었던 아빠 윌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어서

질문에 답하는 것을 싫어하고

자신의 삶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아요


아빠와 딸은 체스를 두기도 하고

사람들로부터 숨는 연습도 하며 지내는데

국립공원 숲 속에 사는 것은 불법이라

어쩔 수 없이 사회복지국의

관심과 도움을 받게 됩니다


집이 어디냐고 묻자

딸 톰은 '아빠와 산다'라고 대답해요

사회복지국에서 마련해준 집과 일터에서

평범한 삶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하는데

소녀 톰은 호기심을 가득한 눈빛으로

공동체의 삶에 쉽게 적응해가지만

세상과 단절한 아빠 윌에게는 쉽지 않아요


전쟁의 후유증으로 불안에 싸여

집안에서 쉽게 잠들지 못하는 아빠를 위해

밖에서 불편한 잠을 자기도 하던 톰은

길에서 만난 토끼 덕분에 또래 친구들과

토끼 동호회 활동도 시작하며

흥미와 재미를 느끼죠

그러나 적응이 쉽지 않은 아빠 윌은

딸을 데리고 다시 숲 속으로 향합니다


아빠가 생필품을 사러 갔다가 다치는 바람에

산속 공동체 주민들의 도움을 받게 되고

아빠가 다친 발을 회복하는 동안

톰은 함께 하는 삶에 어울리게 되죠


벌을 키우는 할머니에게서 톰은

벌의 신뢰를 얻는 방법을 배우기도 해요

벌은 침으로 쏘고 나면 죽기 때문에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 사람을

쏘지 않는다는 말이

인간관계에도 적용이 것 같아요

톰은 양봉 할머니에게서 배운 대로

벌과 신뢰를 쌓아 맨손으로 벌을 만지게 되자

아빠에게도 벌집의 온기를 느껴보라고 하죠


톰과 아빠에게 캠핑카를 빌려준

아주머니와 함께 장을 보고 돌아와

생필품과 식품 들을 가방에 챙겨

더 깊은 숲 속에 사는 누군가를 위해

나무에 걸어두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사랑은 나눔이니까요


남아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함께 나누는 삶이

소박하고 따뜻하고 정겹고 아름다워요

톰에게도 따스함이 스며들어

사람들 곁에 머무르고 싶다고 아빠에게 말하지만 아빠는 또다시 숲 속으로 떠날 채비를 합니다


'아빠 난 안 갈래

아빠에게 잘못되었다고 해서

나에게까지 잘못된 건 아니야'

그렇죠 아빠와 딸의 현실은

분명 다르니까요


그러면서도 짐을 챙겨 따라나서는

딸 톰의 마음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아빠는

눈물 그렁한 눈으로 울음을 눌러 참으며

사랑하는 딸 톰과 작별합니다

사랑하므로 서로의 삶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아빠와 딸의 작별 장면이 가슴 먹먹해요


아빠는 더 깊은 산속으로 향하고

딸은 사람들 곁에 남아

더 깊은 산속에 사는 누군가를 위해

생필품과 식품 들을 가방에 넣어

나무에 걸어둡니다


세상에서 흔적 없이 벗어나고 싶은 아빠와

세상 속에서 살고 싶은 딸의 이야기가

잔잔한 감동과 여운을 남기는

'흔적 없는 삶'


아빠와 딸이 서로를 위해

서로를 보내는 먹먹한 눈빛이

한동안 마음에 남을 것 같아요

사랑은 붙잡아 곁에 두는 것이 아니라

날개를 달아 놓아주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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