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277 진홍빛 비밀의 사랑

영화 '크림슨 피크'

by eunring

언젠가 보다가 중간에서 멈추었던

광기 어린 판타지 스릴러 영화

'크림슨 피크(Crimson Peak)'를 다시 봅니다

이번에도 어쩌면 끝까지 못 보고

중간에서 애매하게 멈출 수도 있지만

그래도 다시 시작합니다

시작이 반이니까요


유령을 볼 수 있는 작가 지망생

당찬 이디스(미아 와시코브스카)와

영국의 매력적인 귀족 토마스(톰 히들스턴)

스스커플의 기괴하고 잔혹한 사랑 이야기가

섬뜩한 공포마저도 기이하게 아름다워요

가혹하고 애절하면서도 몽환적이고

깊숙한 슬픔으로 가슴 먹먹한

진홍빛 비밀의 사랑입니다


크림슨(crimson)은 매우 진한 빨강이죠

연지벌레라고도 부르는 깍지벌레에서 만들어진

밝고 진하고 강렬한 붉은빛이나 자줏빛이래요

크림슨 피크(peak)는 말 그대로

붉디붉은 진홍빛의 끝판왕인 거죠


영화의 제목인 '크림슨 피크'는

토마스와 루실 남매가 살고 있는

아름다운 만큼 음산하기 짝이 없고

비밀스러운 알러데일 저택의 별칭인데요

절반이 부서져 춥고 을씨년스러운 저택은

나무 바닥이 망가져 붉은 진흙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어요

붉은 진흙덩이처럼 비밀스러운

그들의 사랑이 무너져가듯이~


'판의 미로'를 연출한

다크 판타지의 대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공포와 로맨스가 함께하는 매혹적인 영화는

새하얀 눈보라 속에서 피투성이 이디스가

'유령은 존재한다'고 중얼거리며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1890년대 미국이 배경이죠

콜레라로 어머니를 일찍 여읜 이디스는

어머니와 작별인사도 하지 못했어요

전염병이 옮을까 염려한 아버지가

서둘러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죠


어머니와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해

깊은 슬픔에 빠진 이디스의 꿈속에

어머니의 유령이 나타나

'크림슨 피크를 조심하라'는

경고의 한 마디를 남기십니다


그 이후 그녀의 눈에 유령이 보이고

유령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녀는

공포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려고 하는데요

상류사회의 아웃사이더로 지내던 중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비한 매력을 지닌 영국 귀족 토마스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마블 영화에 나오는 토르의 동생

로키 역의 톰 히들스턴이

매력적인 남주인공 토마스를 연기합니다

의도적인 접근으로 거짓 사랑을 시작했으나

이디스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는

애틋한 마음을 섬세하고 애처롭게 보여주는데요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나에게 독을 먹이고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냐'고 묻는 이디스에게

'거짓말을 했고 독을 먹였으나

사랑한다'는 토마스의 대답이

영화의 시작이고 끝이고 전부인 거죠

그 사이를 누나 루실(제시카 차스테인)의

광기 어린 핏빛 사랑이 미쳐버린 바람처럼

거침없이 헤집고 다닙니다


겨울이 되면 하얗게 쌓인 눈밭에

붉은 진흙이 녹아내려 섞이게 되고

그래서 크림슨 피크라고 부른다고

저택의 별칭이 바로 크림슨 피크라는

토마스의 말에 이디스는 피를 토해요

어릴 적 돌아가신 엄마가 꿈속에서

크림슨 피크를 조심하라고 하셨는데

그 한복판에 덥석 들어와 있는 셈이니까요


서랍장 속에 숨겨진 실린더를 찾아 듣고

그동안 토마스와 결혼한 부자 여성들이

모두 살해당한 것을 알게 이디스는

눈보라 치는 문밖으로 나갔다가 쓰러지고

눈보라에 갇혀 꼼짝 못 한 채

루실로부터 비극적인 이야기를 들어요


아버지의 학대와 폭력으로 다리가 부러진

어머니가 루실과 토마스 남매를 학대하자

루실은 보살피던 어머니를 살해하고

서로를 의지하며 지내던 남매는

연인이 되었다는 막장 드라마 같은 비밀이죠


열두 살 토마스와 열네 살 루실은

둘 다 꼬마 괴물이었던 거고

다리가 부러진 엄마를 돌보았듯이

이디스도 그렇게 돌보겠다는

루실의 말이 섬뜩합니다

알고 보니 가난한 발명가 토마스를 반기지 않던

이디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고의 원인이

바로 루실이었어요


폭설이 눈앞을 가로막듯이 쏟아지는데

아버지의 주치의였고 이디스를 짝사랑하던 알렌(찰스 허냄)이 이디스를 구하러 옵니다

눈보라 속에서 누나 대신 알렌을 찌르며

급소를 피해 살리고 탈출구를 알려주는

토마스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디스를 지켜주려 해요


돈이 있으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피붙이 없는 여자들의 재산을 빼앗은 후

죽이고 머리카락을 꼬아서 서랍에 모아두었듯이

이디스의 머리카락을 잘라 서랍에 넣고

이디스의 유산을 가로채기 위해

서명을 받으려는 루실에게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이디스가 묻자

크림슨 피크 대저택의 유지비와

토마스의 연구비를 위해서라고 대답하며

결혼은 돈 때문이고 살인은 사랑 때문이라고

괴물 같은 사랑이라고 루실은 덧붙입니다


어린 시절 토마스는 완벽했다며

서로에 대한 사랑이라고 루실은 말하지만

그를 숨 막히게 할 뿐이라는 이디스의 말처럼

사랑이 아닌 빗나간 광기일 뿐이죠


'이디스 한 번만 믿어줘요

그냥 가도 되고 날 기다려도 좋아요'

이디스가 서명한 서류를 태워버린 토마스는

썩어가는 저택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자고 루실에게 말하지만

이디스를 사랑한다는 토마스의 말에

질투심이 불타오른 루실은

동생 토마스를 칼로 찌르고 말아요

핏빛 사랑처럼 질투도 핏빛으로 물들죠


눈보라 속의 마지막 장면이 가슴 먹먹해요

루실에게 쫓기며 도와 달라는 이디스에게

도와줄 사람 없다고 루실은 말하는데

그 순간 이디스가 뒤를 보라고 하죠

루실이 뒤를 돌아보자 낙엽처럼 바스러져가는

토마스의 유령이 있어요


종잇장처럼 바삭거리는 유령이 되어서도

사랑하는 이디스를 끝까지 지켜주고

이디스의 손이 닿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유령 토마스의 모습이 안타깝고 안쓰럽습니다


유령 토마스의 도움으로

루실과의 핏빛 대결에서 벗어난 이디스는

알렌과 함께 저택에서 탈출하고

유령이 된 루실은 피아노를 연주합니다


유령은 분명 존재한다고 이디스는 거듭 말해요

시간과 장소에 묶이거나 온갖 감정에 묶인

그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고 중얼거리며

크림슨 피크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온

이디스가 자신의 경험을 써서 출판한

'크림슨 피크'라는 제목의 고딕소설을 보여주며

영화는 장렬하게 끝이 납니다


길예르모 감독은 시나리오를 쓸 때

이디스 역을 제시카 차스테인으로 생각했으나

시나리오를 읽은 제시카가

루실 역이 더 흥미롭다고 해서

광기 어린 루실 역을 하게 되었다는

뒷이야기에 고개 끄덕입니다

탁월한 선택~!!


막장 스토리까지도

우아하고 섬세하게 연기하는

히들스턴의 창백하고 신비한 매력

고혹적인 여신미 뿜뿜 제시카 스테인

당차고 당돌한 순수함으로 빛나는

미아 와시코브스카의 야무진 예쁨에

대책 없이 빠져들어요


멋진 배우들을 보는 즐거움과

그들의 진심 연기에 빠져들다 보면

아름다운 의상과 영상과 매혹적인 장면들이

잔혹함 따위 두렵지 않게 합니다


울컥한 핏빛 장면들은

눈을 가리든 화면을 가리든

잠시 손바닥으로 가리면 되는

아름다은 잔혹 영화를 중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보고 나니 여운 또한

붉디붉은 진홍빛으로 남습니다


공포도 때로 아름답고

끈적한 여운을 남기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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