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329 문득 거울 앞에서

'쑥대머리' 한 대목

by eunring

문득 거울 앞에 서니

쑥대머리가 보여요

머리카락이 마구 흐트러져서

몹시 산란한 머리가 쑥대머리죠

쑥대강이라고도 한답니다

지금 내 머리가 그래요

풀더미같이 흐트러져 어수선합니다


안 그래도 게으른데

머뭇머뭇 멈추고 머무르다 보니

자꾸만 더 게을러지는 내 모습이

거울 속에 떠올라 대략 난감하네요


풀더미처럼 어수선해진 머리를

단정한 빗질 대신 손으로 쓱쓱

무심한 손길로 대충 빗어 넘기며

쑥대머리 귀신 형용~중얼거리다가

큰맘 먹고 머리를 자르기로 합니다


거울 속 쑥대머리를 들여다보며

'쑥대머리' 한 대목을 흉내 내는

어설픈 내 모습 위로

구성진 목소리에 맵시도 고우시던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거든요


'쑥대머리 귀신 형용 적막 옥방 찬 자리에

생각난 것이 임뿐이라 보고 지고 보고 지고

한양 낭군 보고 지고'


어린 나를 무릎에 앉히시고

옛날이야기를 재미나게 들려주시던

우리 할머니는 이야기면 이야기 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 빠지지 않는 솜씨꾼이셨거든요

신명 나게 장구도 잘 치시고

한복 떨쳐입은 모습도 단아하셨죠


'쑥대머리' 한 대목을 구성지고 구슬프게 부르시다가 말똥말똥 바라보는 어린 내게

춘향이와 이도령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할머니도 쓸쓸하고 외로우셨나 봐요

할머니의 노래와 이야기에 젖어든

어린 내 마음 어딘가에도 동글동글

슬픔의 물방울이 맺히는 것 같았거든요


'쑥대머리'는 판소리 '춘향가' 중 한 대목이죠

옥중에서 춘향이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한양 간 이도령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구구절절 노래하는 대목으로

'옥중가'라고도 부른답니다


오래전 철부지 시절 판소리 한 대목을

재미 삼아 배워본 적이 있는데요

주제 파악은 빠른 편이라

고개만 들이밀다 말았습니다


노래는 못한다고 하면서도

잠시 잠깐 고개를 들이민 건

아마도 어릴 적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맵시 단아하고 재주 많으시던

할머니처럼 '쑥대머리' 한 대목을

애절하게 부르지도 못하더라도

쑥이나 풀더미처럼 마구 헝클어진

쑥대머리는 되지 말아야겠다 생각합니다


무던하더라도 무심하지는 않게

다정하진 않아도 무정하지는 않게

단정하지는 않아도 산만하지는 않게

무심히 흐르다가도 문득 주위를 돌아보는

따뜻한 눈길을 잊지 말아야지~

거울 속에서 스스로에게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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