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846 불멸의 사랑
영화 '불멸의 연인'
비가 오락가락하는 흐린 가을날
베토벤의 음악을 연이어 들을 수 있는
오래전 영화 '불멸의 연인'을 봅니다
가을비 우산 속 설렘의 사랑이 아니라
불멸의 사랑입니다
베토벤(게리 올드만)의 천사이고 전부이고
분신인 영원한 사랑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절친인 안톤 쉰들러(예로엔 크라베)의
회상으로 이어지는 여정이
베토벤의 음악과 함께
하염없이 흐르는 가을날 빗소리 덕분에
아름답고 쓸쓸하고 적막합니다
영화 '불멸의 연인'은 1827년 3월 29일
위대한 음악가 베토벤의 최후를 비추는
번쩍이는 번개의 빛과 따다다단 따다다단~
'운명' 교향곡 8개의 음표로 시작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모든 걸 주고 떠난 사람
동반자를 찾지 못해 혼자 살다 간 사람'이라는
쉰들러의 애틋한 추모사와 함께
베토벤의 장례식으로 이어지는데요
문이 열리고 위대한 음악가 베토벤의 관이
문 밖으로 나서는 순간 모여들어 에워싸는
수많은 사람들이 베토벤의 죽음을 애도하고
비엔나가 온통 슬픔에 빠져드는 장면에서
베토벤의 '장엄미사' 중
'키리에'가 울려 퍼집니다
베토벤의 장례 행렬이 성당으로 향하고
장례식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속에
검은 베일을 드리우고 슬픔에 잠겨 있는
세 여자의 모습이 보여요
어디까지나 영화적 상상이지만
슬픔에 겨운 그 세 사람 중에
불멸의 연인이 있다는 거죠
베토벤의 마지막을 보살피고 지켜준
막냇동생 요한(제라도 호란)이
유산 상속인이 될 것이라 기대했으나
'나의 모든 음악과 모든 재산은
유일한 상속인 불멸의 연인에게 남긴다 '는
마지막 유언장이 서랍에서 나오자
불멸의 연인이 누구인지 밝히겠다며
베토벤의 오랜 친구이자 비서인
안톤 쉰들러가 앞장섭니다
"나의 천사 나의 전부 나의 분신이여
오늘은 잠시 시간을 내어 몇 자 적으려 합니다'
유서와 수신인 불명인 세 통의 편지를 들고
베토벤의 마지막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베토벤의 영원한 사랑을 찾아 나선 쉰들러는
베토벤이 어느 여인과 만나기로 약속했던
칼스버드 호텔부터 찾아가는데요
베토벤을 끔찍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호텔 여주인은 어느 여인이
베토벤이 예약한 방에 머무르다가
베토벤이 도착하기 직전에 떠났으며
화가 난 베토벤이 막무가내로
의자와 창문을 부수었다고 해요
엄청난 폭풍우가 쏟아지던 날
베토벤의 편지가 도착해서 살짝 뜯어보고
여자에게 갖다 주자 여자는 바로 떠나버렸고 뒤이어 도착한 베토벤이 미친 듯 화를 내며
의자를 유리창문 밖으로 내던지면서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는 거죠
그 여인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호텔 방문자 명부에 남아 있는
그날의 서명뿐인데 안타깝게도
글씨를 잘 알아볼 수가 없어요
쉰들러는 먼저
베토벤이 '월광' 소나타를 헌정한
줄리아 갈렌버그 백작부인을 찾아갑니다
줄리아(발레리아 골리노)는
그 소문이 사실이라며 자신은
베토벤의 제자이고 연인이었다고 합니다
열일곱 살 나이의 줄리아 귀차르드가
베토벤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꿈꾸다가
베토벤의 제자가 되고
연인이 되었다는 거죠
줄리아의 피아노 선생님이 된
기이하고 고집 세고 괴팍한 베토벤은
자존심 강한 무례한 음악가였고
혹독한 피아노 선생님이었다고 해요
베토벤의 재능과 천재성을 보여주려고
아버지와 옆방에서 몰래
피아노 치는 모습을 지켜보는 장면에서
피아노에 귀를 바짝 붙이고 연주하는
베토벤의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피아노 소나타 '월광' 1악장을 치는
그는 이미 청력을 잃어가고 있었던 거죠
자신의 순수한 감정을 시험했다며
불같이 화를 내고 다시는 만나지 않았답니다
베토벤이 줄리아의 집을 떠난 한 달 뒤에
줄리아는 갈렌버그 백작과 결혼했다고 해요
쉰들러는 헝가리까지
에르되디 백작부인을 찾으러 갑니다
귀족이지만 평민들과 어울리며
자유분방하게 살고 있는
안나 마리(이사벨라 로셀리니)는
보통사람들에게는 그의 열정이 불쾌했을 거라고
베토벤을 그리워하며 첫 만남을 회상합니다
이미 청력을 잃은 베토벤이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하다가
소리가 들리지 않자 지휘석으로 뛰쳐나와
'호른' '클라리넷'을 외치며 격정적으로 지휘하지만
연주회는 엉망이 되고 청중들의 야유를 받아요
그 순간 손을 내밀어 베토벤을 데리고 내려오는
안나 마리는 빈에서 세 아이와 함께 살며
남편과 별거 중이었는데
베토벤을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하고
조그만 칠판에 글씨로 대화를 하며
음악적인 공감을 나눕니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빈에 폭격을 퍼부어
안나 마리의 사랑하는 어린 아들이
샹들리에에 깔려 죽는 안타까운 장면에서
'운명' 교향곡이 비장하게 흘러나오죠
나폴레옹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어
나폴레옹의 이름을 붙여 헌정하려 했던
교향곡 3번 '보나파르트'의 제목을
에로이카(영웅)로 바꾸기도 합니다
죽은 아들과 음악으로 대화하라며
친구이자 연인인 안나 마리에게 악보를 건네고 안나 마리의 바이올린 연주 곁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베토벤은
고통과 슬픔을 극복한 음악으로
고통과 슬픔을 겪는 이에게
다정한 위로를 건넬 줄 알았던 거죠
베토벤과 함께 살면서
평온하고 행복했다는 그녀는
베토벤이 그녀를 고해 신부라 부르며
속마음을 진솔하게 털어놓았고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나
그는 아니었을 거라며 웃어요
안나 마리와 대화를 나누며
쉰들러는 베토벤의 마지막 소원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고 하죠
베토벤의 오랜 친구인 쉰들러가
바이올리니스트인 자신의 꿈을 접고
베토벤의 비서가 되어 함께 한 이유는
'크로이처 소나타'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음악의 역할이 무엇인지 묻는 베토벤에게
영혼을 맑게 한다는 쉰들러는 대답에
베토벤은 아니라고 했다는군요
'음악은 끔찍한 녀석이야
행진곡을 들으면 행진을 하고
왈츠를 들으면 춤을 추고
미사곡을 들으면 기도를 하지'
음악이란 작곡가의 감정일 뿟
듣는 사람의 입장은 중요하지 않고
청중은 선택의 여지가 없으며
작곡자의 감정을 느껴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한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하며
한 남자가 연인에게 가는데
빗속에 마차 바퀴가 진흙 웅덩이에 빠져
몹시 초조한 마음을 나타내면서
인생은 이런 거라고 말하는 게
음악이라고 했답니다
불멸의 연인을 만나지 못한
베토벤의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크로이처 소나타'에 그대로 담겼다는 거죠
음악에 대한 베토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베토벤을 따르며 돕게 되었답니다
베토벤의 편지를 안나 마리에게 보여주자
자신에게 쓴 게 아니라고 고개를 내저어요
베토벤과의 사이에 끼어든 여자가 있었다고
베토벤은 그 여자를 잊지 못했다고 대답해요
쉰들러는 베토벤의 동생
카스퍼(크리스토퍼 펄포드)의 아내인
요하나(조한나 터 스티지)에게 가서
필체를 확인합니다
호텔 방문자 명부 서명을 확인한 요하나는
이미 베토벤을 이해했다고 하죠
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 덕분에
그를 이해하고 용서했으며
그런 아름다운 음악을 만드는 사람을
어찌 미워할 수 있겠냐고 덧붙입니다
베토벤과 요하나는
조카 칼의 양육권 문제로
법정 싸움까지 벌인 애증의 관계였죠
동생 카스퍼가 죽은 후 요하나 대신
칼의 법정 후견인이 된 베토벤은
사랑하는 조카 칼을 피아노에 앉히고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해 주며
칼이 음악가가 되기를 바랍니다
소송에서 이긴 후 칼에게 전념하는 동안
베토벤의 음악 인생은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그의 모든 사랑이 칼에게 쏟아지고
칼을 바라볼 때 기쁨으로 빛나지만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진 칼은
권총으로 스스로 생마감하려다 실패하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메모를
칠판에 남기고 베토벤 곁을 떠납니다
칼의 자살미수 때문에 베토벤은
공공연하게 비난과 조롱에 휩싸입니다
조카 칼이 곁을 떠난 후
베토벤이 작곡한 9번 교향곡
'합창'의 초연 무대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의 순간
베토벤은 어린 시절을 추억합니다
네모난 창문 밖을 내다보던 소년 베토벤이
술꾼 아버지가 돌아오는 소리에 놀라
창문 밖으로 달아나 어두운 숲 속을 달려가고
무수히 빛나는 밤하늘의 별빛들이
고요한 호수 위로 별꽃이 되어 쏟아집니다
별들의 호수에 누운 소년 베토벤이
별밭과도 같은 검푸른 우주를 바라보는 순간 합창단이 부르는 환희의 송가가 울려 퍼지고
한 떨기 별이 된 소년 베토벤이
아름다운 별무리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이
가슴 먹먹합니다
어린 시절의 회상에서 돌아와
청중들의 박수소리를 등지고 서 있는
베토벤을 지휘자가 돌려세우자
환호하는 청중들 앞에
고개 숙이는 장면이 뭉클합니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베토벤은 요하나를 찾아요
칼의 양육권을 돌려주고 악보의 귀퉁이에
'그래야 하지 않겠냐?' 베토벤이 묻자
'그래요'라고 답을 쓰는 요하나에게
'이 희극도 이제 끝이야'라고
작별 인사를 건넵니다
불멸의 연인에게 보내는 베토벤의 편지를
요하나에게 건네고 돌아서는 쉰들러와
작은 창문으로 편지를 읽으며 울고 있는
요하나의 모습을 다정히 위로하듯
베토벤의 황제 2악장이 흐릅니다
칼스버그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폭우로 베토벤의 마차가
진흙 구덩이에 빠지는 바람에
약속시간보다 늦어 먼저 편지를 보냈으나
입덧에 시달리던 요하나는
물병 아래 놓여 있는 편지를 미처 보지 못한 채
기다리다 말고 서둘러 떠났던 거죠
'때로는 슬픈 추억과 때로는 기쁜 추억으로
운명의 끈이 우리를 다시 이을 때까지'라고
쓰여 있으나 운명이 그들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은 걸까요
영화에서는 요하나를
불멸의 연인이라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영화적 설정일 뿐
베토벤 연구자들에게 불멸의 연인은
아직 베일에 싸여 있는 존재라고 해요
그 누구이든 베토벤에게 고독을 선물한
불멸의 연인 덕분에 불멸의 명곡들이 태아나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위로의 손길이 되고 있으니
고마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