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836 여름아 잘 가
커피 친구 엘리게이터 파이
햇살이 뜨겁습니다
아침 바람이 제법 선선하고
공기가 한결 보송해진 걸 보니
짐 챙겨 슬슬 뒷걸음질 치는
여름의 치마꼬리 붙잡고
가을이 오기는 오나 봅니다
한여름 무더위에 지쳐
집 가까이 카페만 들락거리다가
살살 부는 바람이랑 손 잡고
고무줄도 아닌 산책길을
좀 멀리까지 쭉쭉 잡아 늘여서
산책 삼아 들르던 베이커리 카페까지
한번 가보리라 생각합니다
커피 맛과 향도 괜찮고
분위기도 조용해서 번거롭지 않고
페스추리와 파이를 제법 잘 만드는 곳이니
달콤 바삭한 파이도 한 조각 사야겠어요
악어의 등껍질 닮아 엘리게이터라 불리는
바삭하고 고소한 피칸파이를
미리 찜해 두었거든요
겹겹이 얇고 가벼운 결이 살아 있어
쫀득 촉촉하고 바삭 달콤함이 매력적이라
다시 한번 먹어보리라 생각만 하다가
올여름 너무 뜨겁고 무덥고 비도 잦아
산책길을 짧고 단순하게 줄이는 바람에
나중으로 미루고 또 미루었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무더운 여름이
서서히 뒷걸음질 치자마자
가을맞이 기분으로 들뜬 발걸음에
엘리게이터 파이를 영접할 생각으로
좀 멀리 돌아가는 산책길도
설렘으로 룰루랄라~
그런데 말입니닷~
역시나 나중이란 없어요
나중은 기다려주는 법이 없어요
그 사이 베이커리 카페가 문을 닫고
휘리릭 사라지고 말았거든요
이런저런 앙증맞은 파이들이
먹음직하고 사랑스러워서
오늘은 이거 내일은 저거
다음에는 저기 저거
다채롭게 골라먹고 찜해두기도 하던
순간순간의 재미가 은근 쏠쏠했는데요
소소하지만 제법 확실한 그 즐거움이
떠난다는 인사 한마디 없이
무정하게 사라진 바로 그 자리에
낯선 카페가 자리를 잡고 있으니
이를 어쩔~
엘리게이터 파이는
엘리베이터 타고 슝 사라지고
하릴없이 돌아서는 길목에
누군가 다소곳이 모아놓은
주홍 열매들이 예뻐서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봅니다
사랑스러운 나무 열매가
또르르 맺혀 떨어진 걸 보니
곧 가을이라고 생각하다가
아니라고 고개를 내젓습니다
여름이라는 말의 어원이
열매라는 뜻의
열음에서 온 거라면
올여름을 마무리하는 열매인 거죠
엘리게이터 파이는 구경도 못 하고
엘리베이터만 타고 오르락내리락
여름 열매인지 섣부른 가을 열매인지
주홍빛 이름 모를 열매들을 바라보며
파이 대신 또랑한 열매로
여름을 마무리합니다
여름아 잘 가~
너도 애 많이 썼으니
훌훌 털고 가벼운 걸음으로
이왕이면 휘리릭 엘리베이터 타고 가
바삭 쫀득한 엘리게이터 파이는
내년 여름에 먹기로 하고
뒤돌아보지 말고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