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837 가을이라는 이름
가을색 버건디
가을엔 3 빵 3색이라는
신상 빵소식에
어머나 침부터 꿀꺽~
연이 닿지 않는 신상 백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신 포도와 같아
무심히 노룩패스해도 아쉬울 것 없으나
신상 빵과 신상 과자는 못 참으니
부지런히 맛보러 나가야죠
그런데 내 눈앞 접시에는 이미
3 감자 3색이 떠억하니 놓여 있으니
땅 속의 사과라는
포실 감자부터 먹어 봅니다
자주색 노란색 아이보리색
3색 3 감자를 앞에 두고
어떻게 맛이 다른지 궁금한데요
입맛이 세분화되지 않은 내게
맛의 차이는 거기서 거기
그러나 빛깔이 다르니
눈이 즐겁습니다
포슬포슬 감자는
하지 전후에 많이 거두어들이므로
하지감자라 부르기도 하는데
계절이 이미 가을로 접어들어
감자 철이 한참 지나고 말았으니
한물간 감자라고 하면
감자가 귀 쫑긋 듣고
흥칫뿡 할지도 모릅니다
한물갔다는 말은
전성기가 지났다는 거죠
채소나 과일이 한창 쏟아져 나올 때를
한물이라고 표현하니까요
포슬 포근 감자를 한 입 먹으며
고흐가 사랑했다는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배경은 몹시 어둡고 칙칙합니다
식탁에 모여 앉은 가족은 가난하지만
작은 램프 아래서 감자를 먹으며
고흐의 따뜻한 시선과
귀한 사랑을 듬뿍 받았으니
행복 가족입니다
권태응 시인의
'감자꽃'이라는 시도 떠올라요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에 대한
저항으로 쓴 시라고 하니
그 시절 우리 민족의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6월 초순 무렵
흰색과 자주색으로
소박하게 피어나는 감자꽃은
향기가 거의 안 난다고 해요
꽃이 주인공이 아니라
열매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꽃이 피어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일부러 꽃을 따낸다고 합니다
감자 열매로 가야 하는 영양분이
꽃으로 가면 안 되기 때문이래요
소박하게 피어나는 하얀 감자꽃
도도하게 피어나는 자주 감자꽃
하양 자주 감자꽃 이미 진 자리에
차분히 걸음으로 다가서는
가을이라는 이름은
잘 여문 열매를 끊어내다의 옛말
'갓다'에서 온 말이라고 합니다
갓다에서 갓을로 되고
가슬이 되었다가
발음하기 부드럽게
가을이 된 거죠
남쪽지방에서
곡식을 거둬들이는 것을
가실한다고 하는데
거기서 유래했다는 의견도 있답니다
어쨌거나 가을이라는 이름은
부르기에도 좋고 듣기에도 좋고
도도한 자줏빛과 잘 어울리는
부드럽고 여유로운 이름입니다
올 가을 명품백들의 색은
약속이라도 한 듯
깊고 고혹적인 버건디라죠
버건디는 브루노뉴의 영어 발음으로
프랑스 브루고뉴 출신
붉은 포도주의 색이랍니다
흔히 와인색이라고 하는데요
패션 용어로는 자주색이고
진하고 붉은 버건디는
중세 귀족들이 좋아하던 색이래요
따뜻하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주고
우아하고 차분하고 품위 있는 버건디는
다른 색과도 조화롭게 어울려
풍요로운 가을 색으로 딱 맞춤입니다
3 감자 3색을 앞에 두고
버건디 빛깔의 가을을 맞이합니다
색도 곱고 맛도 좋고 몸에도 이로운
자주 감자 한 조각과 함께
서로에게 가을 인사 건네기로 해요
지난여름 무더위를 잘 견뎌낸
그대와 나의 울 가을이
무르익은 한 잔의 와인처럼
우아하고 향기롭게 찰랑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