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484 엄마의 내일

영화 '나의 어머니'

by eunring

바람 어수선하고

빗방울 톡톡 떨어지는 저녁

어버이날 특집 영화를 봤어요

제목은 '나의 어머니'


마르게리타는 영화감독으로 일해요

촬영장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멋진 감독이지만

꿈인지 현실인지 잠에서 문득 깨어난 그녀가

바닥에 흥건히 깔린 물을 신문지 뭉치를 꺼내 덮어가며 당황하는 모습이 안쓰럽고 안타까워요

그녀가 처한 막막한 현실과도 같거든요

일도 사랑도 이별도 그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그녀의 모습이 절박합니다


한 사람의 어른이고 멋진 일도 있고

남편과는 떨어져 지내는 사이지만

사랑스러운 딸 리비아도 있어요

하지만 그녀의 모든 것이

뒤죽박죽 엉망으로 엉겨서

물웅덩이에 빠져든 것만 같아요


지금도 여전히 엄마가 필요한 딸이라

일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때는

엄마 품에 안겨 울기도 하는데

그녀의 엄마는 병으로 입원 중이고

'늙을수록 사람들이 얕잡아보지만

늙을수록 지혜로워진다'며

퇴원을 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달리

엄마의 건강은 하루하루 나빠지고 있어요


사춘기 딸 리비아는 라틴어 공부 대신

스쿠터 면허 준비에 열심이고

외할머니에게 털어놓는 남자 친구 이야기를

정작 그녀에게는 하지 않으며

사춘기를 겪는 중이죠


영화감독으로 일하는 것도 녹록지 않아서

기자회견 도중 그녀는 중얼거립니다

'엄마 도와줘'

문학 교사였던 엄마는 아파서

이제 이상 그녀를 도울 수 없으니

막막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병원에서 지내시던 엄마는

폐렴에 심장 문제까지 겹쳐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면회 시간이 빠듯한데 손녀 리비아에게

라틴어를 가르쳐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떨리는 손으로 공책에 비뚤 글씨를 쓰다가

조금만 더 있다가 가라고 쓰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십니다

한 순간의 삶도 만만치 않고

죽음을 향한 걸음 역시 녹록지 않아요


삶과 마주 선 그녀도 순간순간 버겁고

죽음의 문밖을 서성이는 엄마도

걸음걸음 위태롭습니다

그래도 딸은 여전히 엄마에게 기대고 싶고

엄마는 딸과 함께 하는 시간이 좋으신 거죠


사랑하는 엄마와의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그녀의 일상이 초조함으로 뒤덮이고

현실과 환상이 어수선하게 교차되는데요

영화 촬영은 생각처럼 순조롭지 않고

그녀의 눈에 자꾸만 엄마가 밟힙니다


예전에 엄마와 지내던 장면들이

느닷없이 불쑥불쑥 되살아나고

그녀의 조바심 속에서

환자복 차림으로 거리를 서성이며

한 걸음씩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엄마의 모습이 낯설고 안타깝습니다


배우 배리는 버벅거리며

대사도 엉망 장면도 엉망 영화도 엉망이라고

연기는 시간 낭비에 인생 낭비라며

현실로 돌아가겠다는 폭탄선언으로

촬영 현장을 뒤흔들어 놓아요


팍팍한 현실에 지쳐 무너질 때마다

엄마에 대한 환상이 마구 뒤섞이면서

그녀는 일상의 평온함에서 점점 멀어지고

들끓는 감정을 조절하기조차 쉽지 않아요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엄마를 부축하다가

휘청이며 못 걷겠다는 엄마에게

겨우 세 걸음이라며 울음을 터뜨리는

그녀는 엄마 앞에서는 어린 딸일 뿐이죠

겨우 세 걸음이 버거우신 엄마와

겨우 세 걸음도 제대로 부축할 수 없는

딸의 아픔이 절절합니다


사랑하는 엄마를 보내야 하는

안타까운 시간 속에서도

그녀의 삶은 어김없이 이어집니다

그녀가 사는 방식이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는

뼈 때리는 말을 듣기도 하고

엄마를 보살피기 위해 휴직을 한 오빠는

스태프들의 사진과 촬영 메모 등을 들고

자신의 기억력이 좋지 않다는

안쓰러운 고백을 하러 온 배우 배리에게

평생 혼자만 옳은 감독과는

계약하지 말라고 조언을 하기도 합니다


엄마와의 작별을 준비하면서도

어수선한 일상은 이어지고

영화 촬영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영화 촬영 중 엄마의 소식을 듣게 된 그녀는

차분하게 그날의 촬영을 정리하고

오빠와 함께 엄마와의 마지막을 함께 하는데요

이별의 순간이 흑백영화처럼 고요해서

슬픔까지도 묵묵하고 깊숙이 다가섭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가르치던 제자들에게서

뭐든 귀담아들으시고 호기심이 많으셨다고

선생님은 어머니처럼 삶을 가르쳐 주셨다는

정겨운 추억담을 듣고 난 후 그녀는

엄마의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책들과

엄마가 앉아 책을 읽으시던 빈 의자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슬픔이 깃든 웃음을 지어요


사랑하는 엄마의 죽음을 겪고 견디며

그녀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엄마와의 시간을 다정히 추억하면서

마음을 다잡는 모습이 애틋합니다


엄마 무슨 생각해?

병상에 누운 엄마에게 그녀가 물었을 때

엄마는 웃으며 대답하십니다

'내일'


영화의 엔딩이 바로 내일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엄마는 내일을 생각하셨고

엄마의 내일은 이제 그녀의 몫이 되었으니

지금부터 그녀는 어제의 엄마를 가슴에 품고

엄마의 내일을 힘차게 살아가야 하는 거죠


그녀의 가슴속에서 오래오래

내일을 생각하며 머무르실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들께

해맑은 노란 장미를 드리고 싶은

깊은 사랑의 오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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