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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ring Sep 24. 2022

초록의 시간 520 잔망스럽다는 말

잔망의 계절

서늘한 바람이 후드득 소나기처럼 밀려와

계절을 앞서가는 마른 이파리들이

바스락 소리 내며 옹기종기 모여드는데

넙죽한 초록 이파리 하나 물색없이

그 사이로 덥석 끼어들어요

그 모습이 잔망스러워

사진으로 찍어봅니다


소나기도 제멋대로 오락가락

해님도 제맘대로 들락날락

바람은 이리저리 활개를 치며 들쭉날쭉

집 밖을 나설 때마다 창밖을 내다보며

우산을 챙겨야 하나 양산을 들어야 하나

바람막이 옷을 챙겨야 하나

잠시 망설이는 계절이 되었어요


빗줄기 쏴아  빗방울 톡톡

바람소리 소나기처럼 후드득

그러다 해맑은 하늘이 쏘옥

작고 여린 잎들이 바람에 휘날리며

갈팡질팡 떠도는 모습도 안쓰럽고

큼직한 잎사귀들이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도 애잔합니다

날씨 따라 기분도 울적하다가 개운하다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잔망을 떨어요


잔망이란 얄밉도록 맹랑함

또는 그런 짓을 뜻하는 말인데요

잔망을 떨다 잔망을 부리다 잔망을 피우다 잔망하다 등으로 쓰인답니다


몸이 매우 약하고 가냘플 때

태도나 행동이 가볍고 자질구레할 때

얄미우리만치 맹랑할 때

잔망스럽다고 표현하는데

황순원 단편소설 '소나기' 소녀가

얄밉도록 당돌하고 맹랑한 소녀였죠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고 말한

애잔한 소녀더러 소년의 어머니가

잔망스럽다고 했거든요

그래서인지 잔망스럽다는 말이

애틋하고 애처롭게 들리기도 합니다


뽀롱뽀롱 뽀로로에 등장하는

귀요미 분홍 캐릭터 잔망 루피도 있어요

착하고 상냥한 루피의

깜찍한 반전 캐릭터가 잔망 루피라서

귀엽고 깜찍하게 느껴지는 말이기도 하죠


계절 중에서는 딱 이맘때가

잔망스러운 계절이 아닌가 싶어요

눈부신 햇살도 잔망을 떨고

느닷없이 부는 바람도 잔망을 피우고

빗방울도 오락가락 잔망을 부리며

날씨도 들었다 놨다

가랑잎도 들었다 놨다

사람 마음도 들었다 놨다 하니까요


잔망 루피처럼

깜찍한 걸음으로 불쑥 찾아와

애틋한 소녀 감성으로 물들어가는

가을은 잔망의 계절입니다


느닷없이 찾아와 고개 들이밀고

우수수 감성 이파리 소란스럽게 떨구며

사람 마음을 쥐락펴락

그리움 한 보따리 헤집어놓고

잰걸음으로 금방 가버릴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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