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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ring Sep 23. 2022

초록의 시간 519 납작 구두 벗어던지고

하이힐을 신은 하늘

하늘도 가을을 타는가 봐요

가을 하늘이 되더니 키가 쑥 자라고

키가 자란 만큼 마음도 깊어지고

파란 눈망울에 우수가 젖어들어요


가을 하늘이 점점 높아지는 걸 보다가

빼딱 구두를 생각하며 혼자 웃어요

어릴 적 재미난 놀이 중에

빼딱 구두 놀이가 있었거든요


엄마는 납작 신발을 신으셨지만

멋쟁이 고모 덕분에

발에 한참 큰 빼딱 구두를 신고

아슬아슬 걸어보는 멋쟁이 놀이였죠


멋쟁이 고모의 굽 높은 하이힐을

우린 빼딱 구두라고 불렀어요

빼딱 구두를 몰래 신어보는 재미에 빠져

삐뜰빼뚤 걸어 다니다가 넘어지기도 하며

까르르 깔깔 웃어대곤 했어요


가을 하늘은 편한 납작 신발 벗어던지고

아슬아슬 빼딱 구두를 신은 것 같아요

발에 맞지 않는 빼딱 구두를 신고

서툴게 걸으며 웃어대던 어린 날이

문득 그립습니다


늘 납작 신발만 신고 다니는 나는

가을 하늘처럼 가을을 타면서도

납작 구두를 벗어던질 수가 없어요

신발장을 열어보아도

나를 위한 빼딱 구두는 없으니까요


엄마는 여전히 납작 신발을 신으시고

빼딱 구두 신던 멋쟁이 고모는

오래전 하늘 여행을 떠나셨으니

고모의 빼딱 구두를 몰래 신어보며

까르르 웃을 수도 없게 되었어요


밝고 환한 가을 햇살 아래

빨랫줄 하나 걸어놓고

어릴 적 빼딱 구두 놀이 대신

소꿉놀이하듯 빨래 놀이를  봅니다


새파란 가을 하늘에 물들어가는

철부지 마음을 조몰락조몰락

맑은 물 똑똑 흐르게 빨아서

빨랫줄에 주름 없이 펼쳐 널어요


가을 하늘 닮아 시리게 파래지는

내 마음이 눈부시게 맑아지고

햇살을 품고 보송보송해지라고

바람에 살랑이며 나풀나풀 웃으라고

빨랫줄에 내 마음도 걸어놓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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