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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ring Oct 25. 2023

초록의 시간 605 바람이 운다

바람의 미소

바람이 분다~고 하는데

바람이 운다~고 말하고 싶어요

우리가 저마다 다르게 살아가듯이

바람도 다르게 불어오고

다른 목소리로 울 것 같아요


우리가 같은 곳을 향해

나란히 걷더라도

걸음걸이가 다르고 보폭도 다르고

바라보는 시선 또한 같지 않고

마음이 향하는 곳 역시 다르며

걸어가는 발자국의 깊이

저마다 서로 다르듯이~


바람의 노래라고 하는데

바람의 하소연 같아요

바람이 어디에도 마음 둘 곳 없어

이리저리 혼자 마구 나댕기고

어느 누구에게도 손 내밀거나

마음 기대지 못하고

혼자 제멋대로 쏘댕기며

울다 웃다 하는 것 같아요


우리의 걸음도 그렇잖아요

기쁨으로 마구 뛰어갈 때도 있고

슬픔으로 가라앉는 묵직한 걸음도 있고

이리저리 헤매며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어디로 가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어

머뭇거리는 제자리걸음도 있으니까요


철부지 어릴 적 동화 속에는

창백한 얼굴에 긴 머리 소녀가

휠체어를 탄 채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는 장면이 있었어요

땅을 딛고 또박또박 걷지 못하는 대신

마음만은 바람 따라 훨훨 날아다니는

슬프고도 아름답고 고요한 풍경 하나가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는데

그 동화의 제목이 무엇이었는지는

안타깝게도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


소녀의 이름도 떠오르지 않고

줄거리와 결밀도 다 잊고 말았지만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는

소녀의 애잔한 표정과 눈망울은

유난히도 기억 속에 선명한데

지금 내 눈앞에는

이름 모를 그 소녀 대신

애잔한 소녀의 눈망울 닮으신

울 엄마가 휠체어에 앉아계십니다


내 눈앞의 현실이 과연 실화일까요

이게 실화냐~ 중얼거리다가

나 어릴 적 정말 그런 동화가 있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휠체어에 앉으신 엄마를 바라보니

엄마가 바로 그 소녀 같기도 해요

얼굴이 창백한 긴 머리 소녀가 아닌

얼굴이 희고 머리카락도 하얀

짧은 커트머리 엄마가

바람의 미소를 머금고 계십니다


엄마는 동화 속 소녀처럼

두 발로 또박또박 걷지 못하고

휠체어에 앉아 시지만

마음만은 지금 당장이라도

동화 속 긴 머리 소녀처럼

바람이 되어 나풀나풀

온 세상을 날아다니실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어요


엄마의 걸음은

바람의 걸음이라서

세상 어디든 갈 수 있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고

엄마의 잔잔한 미소는

바람의 선물이라고 믿고 싶어요


바람이 상냥하게 손잡아주고

바람이 앞장서서 이끌어주고

바람이 휠체어 바퀴를 동글동글

조심스레 밀어주며 

세상 어디를 가든

다정히 함께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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