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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ring Apr 24. 2023

초록의 시간 564 슬픔의 우물에서 건져 올린

영화 '미스터 홈즈'

한때 명탐정 셜록 즈의 열혈팬이었죠

방학이면 탐정의 추리에 빠져 지내던

철부지 어린 시절이 문득 떠올라

사르르 입가에 미소가 번집니다

추억의 솜사탕을 덥석 입에 문 것처럼

기분이 달달해지거든요


그땐 철없이 어리기만 하고

또박또박 지나온 시간보다

앞에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아서

문득문득 아득한 마음에 휩싸이곤 했어요

막막함 속에는 그리움과 쓸쓸함

그리고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온갖 감정들이 소용돌이쳤어요


작고 어린 마음의 소용돌이는

그리 크지 않고 깊지도 않았으나

부드럽고 짙푸른 안갯속 같아서

생각이 온통 푸르스름하게 물들곤 했죠


그런데요

영화 '미스터 홈즈'

명탐정 홈즈가 아닌

93세가 된 백발 할아버지

미스터 홈즈의 이야기입니다


탐정 은퇴 후 한적하고 평화로운 시골에서

꿀벌을 키우며 살아가는 미스터 홈즈

곁에는 절친 왓슨도 없고

형인 마이크로프트도 없고

숙적 모리어티 교수도 없어요

외로이 혼자 남은 그의 곁에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먼로 부인과

먼로 부인의 아들 똘망 소년 로저가 있을 


점점 기억이 흐려져 가는 홈즈는

사건을 추리하며 해결할 필요가 없는데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떠나온

마지막 사건에 대한 글쓰기에 몰두합니다

미안힘과 죄책감으로 얼룩져 남이 있는

앤의 사건을 밝히기 위해

느릿느릿 글을 쓰는데요


사실과 진실 그리고 이해는 분명 다르죠

죽음과 애도는 주변에 널려 있으나

그러한 감정이나 감상에 젖어들기보다는

논리와 증거에 집중하던 그는

명탐정 홈즈입니다

한때 명탐정 홈즈였죠


지금은 미스터 홈즈

은퇴한 지 어느덧 35년이 된

93세 할아버지 홈즈입니다

하나둘 지워지는 기억이 안타까워

잊지 않으려고 글을 쓰지만

마주 앉은 이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땐

미리 소매 끝에 적어둔 이름을

슬쩍 보기도 해요


사건 해결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을 담은 마무리를 위해

기억을 더듬어가는

 미스터 홈즈의 모습이 안쓰러워요


앤의 사건을 되짚어 회상하는 장면에서

"슬픔의 우물'이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누구나 마음 저 깊은 곳에

슬픔의 우물 하나씩 지니고 살아가니까요


앤과 아주 잠깐 대화를 나누며

탐정 홈즈는 사실과 진실을 알려주지만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하지는 못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대신

앤은 죽음을 선택하고 말아요


당시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사건의 진실이 아니라

외로움을 나눌 수 있는

영혼의 친구였으니까요


'외로운 두 영혼이 안식할 곳이

어딘지 아느냐'라고 묻는 

앤의 눈빛과 표정이 오래 마음에 남아요

그녀가 원한 건 진실이 아닌 진심이었으나

그 시절 홈즈는 미처 몰랐던 거죠


그러나 영화 '미스터 홈즈'에 나오는

슬픔의 우물은 차갑지 않고 따뜻합니다

노인 홈즈와 소년 로저가 주고받는

아름다운 사랑과 이해의 물결이

찰랑찰랑 슬픔의 우물을 따사롭게 합니다


'이제 알았니

머릿속 생각은 다 말하는 게 아니야'

먼로 부인이 아들 로저에게 건넨 말이죠

모든 것을 다 알더라도

생각을 그대로 말하면 안 된다는

그녀의 말이 오래 남습니다


물론 영화 속 대사지만

진실은 때로 가혹한 상처로 남게 되고

영화 속 인물 미스터 홈즈까지도

그때 몰랐던 것을 이제 비로소 알게 되어

돌아보면 걸음마다 후회만 남게 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인생이라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의 우물에서 건져 올린

방울방울 슬픔의 알갱이들이

무지개처럼 펼쳐내는

이 순간 눈부신 반짝임을 안고

비로소 웃을 수 있는 거죠

어쨌든 살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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