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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ring Aug 31. 2023

초록의 시간 589 가을에게 길을 묻습니다

일본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유난히 빗소리 소란하고 번거롭던

여름과 작별 인사를 나누라고

하늘이 오랜만에 푸른 미소를 보여줍니다

세탁기 돌려 빨래가 보송보송 말라가는 동안

다가오는 가을에게 길을 물으며

한 편의 영화를 봅니다


내 곁에서 사랑하는 이들이 점점 사라져

언젠가는 외톨이가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며

소녀 사야카노란 해바라기 곁을 스쳐지나 

마구 달리기 시작합니다


강아지 루의 이름을 부르며

마구 달려가는 소녀는

이제 여덟 살 꼬맹이 소녀입니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던 소녀는

우연히 강아지 루를 만나 마음을 기대며

함께 지내는 시간 속에서 사랑을 배워가지만

소녀에게 새로운 세상을 알려준

강아지 루는 봄과 함께 떠나고

여덟 살 소녀 사야카는

한없이 낯선 이별의 아픔을 겪게 됩니다


꼭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다짐하며

루와 함께 다니던 동네를 서성이다가

아들을 잃은 후세 할아버지를 만나

그리운 이들을 함께 찾으러 나서기로 해요

소중한 건 기다리는 게 아니라

찾으러 떠나는 거라~


후세 할아버지의 텅 빈 병상 앞에서

할아버지가 아침에 돌아가셨다는 말에

한참을 말없이 서 있다가

할아버지와 작별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지만

대학병원에 시신을 기증해서

친척이 아니니 만날 수 없다는 대답에

기증이 뭐냐 묻는 여덟 살 어린 꼬맹이 소녀에게

낯선 이별은 또 그렇게 찾아옵니다


할아버지와 고이치로 그리고 강아지

그리운 이들과 작별을 나누는 시간은

밤길처럼 어둡고 막막하기만 한데

거기로 가고 싶은데 길이 없으니

데려가 달라는 소녀의 부탁은 안타깝고

기다려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는

소녀의 안타까움을 헤집으며

빨간 기차가 지나갑니다


빨간 기차에 오르는 이들에게

기다려달라고 외치는 소녀를 향해

그들은 손을 흔들며 사라집니다

기차는 떠나고 소녀는 혼자 남아 

사라져 가는 기차의 꽁무니를

오래도록 바라다가 중얼거려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그리운 이들이 떠난 곳으로 갈 수 있게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달라는

소녀의 목소리가 잔잔히

오래 남을 것 같아요


이별의 끝에서 다시 밝아온 아침

'다 함께  전철을 타자고 약속했다'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소녀가 중얼거립니다  

역으로 가는 길은 어디냐~


소녀의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길 잃은 강아지 한 마리가 조르르

풀숲을 헤치며 소녀를 향해 달려오고

소녀는 새로 만난 강아지와 함께

활짝 웃으며 달려갑니다


고마워 루~

파란 유리조각을 들고 바라보는

소녀의 하늘에 햇살이 가득하고

강아지와 함께 달리는

소녀의 치맛자락 끝에서

풀꽃 같은 희망이 나풀거려요


내 나이 여덟 살 어린 시절은

이제 기억에서 가물가물하지만

그 시절 내 곁에 머무르던 이들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세월만큼 나이 들지 못하고

이제는 내 곁에 없는 이들을

문득 떠올리며 내다본 창밖 하늘에

가을이 한 걸음 먼저 다가와 있어요


여덟 살 소녀는 아니지만

다가서는 가을에게 길을 묻습니다

어디로 가면 되니?

그리운 이들을 만날 수 있는

기차역은 어디쯤 있을까?

역으로 기는 길을 내게도

살며시 알려 주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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