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unring Oct 05. 2023

초록의 시간 596 나 홀로 커피타임

마법의 순간

청춘과도 같이 싱싱한

부추 한 단을 샀습니다

빗소리의 소란함을 달래며

바삭하게 부추전을 부쳐 먹으려고요

그러나 생각뿐 손이 따라주지 않아

잔머리만 굴리며 게으름 피우다가

그냥 비 오는 하루가 갔습니다


하루 지난 부추를 보며

멈춘 빗소리 따라

물 건너간 부추전 대신

쌀쌀해진 날씨에 어울리는

부추 수제비를 해 먹자고

생각하며 중얼거리다가

부질없이 또 하루가 지났습니다


날이 맑으면 맑아서

비가 오면 비가 와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불어서

먹고 싶은 건 하나둘 떠오르는데

어릴 적 함께 살던 솜씨 좋은 고모도 없고

솜씨 꽝이지만 이것저것 해주시던

엄마는 음식에서 손을 놓으신 지 오래


먹고 싶다고 해도 해 줄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해 먹어야 하는 내가

왠지 짠해서 마음이 찡해졌어요

부추 한 단에 마음까지 찡해지다니

그 또한 민망해서 피식 웃고 말았죠


게으른 손이 생각의 부지런함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이에

냉장고 채소칸 안에서 시들시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가며

하루이틀 부질없이 말라가는 

부추를 오도카니 바라보다가

더 시들기 전에

일단 씻어두기로 합니다


그리고 동네 한 바퀴~

무엇이든 느리게 천천히

미루고 쉬어가며 해야 되는 거니까요

깨끗이 씻어는 두었으니

이미 절반은 한 셈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음식은

남이 해주는 게 최고인데

날 위해 음식을 만들어 줄 사람은

이제 남이 아닌 나뿐이니 어쩔~


부추전이든 부추수제비

먹고 싶은 마음 고이 접어

부추와 함께 밀폐용기에 넣고

일단 남이 내려주는 커피 한 잔

마시며 잠시 마음을 비워야겠어요


부추전 먹은 셈 치고

개운한 아메리카노 한 잔

부추수제비 한 그릇 먹었다 치고

푹신한 의자에 앉아

게으른 자의 여유를 부려봅니다


부추전 한 조각과 부추수제비

맛있게 다 먹은 셈 치고

이도 저도 번거로우면

부추 듬뿍 넣어

달걀말이라도 하면 된다고

습관처럼 잔머리 굴려가며

나 홀로 커피타임~


커피잔 속에 부추전도 있고

한 그릇 부추수제비도 있고

빛깔 곱고 폭신한 부추달걀말이도 있으니

한 단의 부추가 한 잔의 커피가 되는

향기로운 마법의 순간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초록의 시간 595 빗소리 구성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