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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ring Oct 02. 2023

초록의 시간 594 가을 한 뼘 덕분에

보송하고 상냥하게

덥석 손 내밀어 마주 잡고 싶은

기분 좋은 바람이 지나가고

가슴 가득 끌어안고 싶도록

보송하고 상냥한 햇살 머무르는

새하얀 빨래들 사이에서

나도 한 자락 빨래가 되어

깃발처럼 나부끼고 싶어요


바람이 부르는 노랫말에는

반짝이는 그리움이 맺혀 있

햇살이 흥얼대노랫가락마다

맑은 슬픔이 묻어있지만

가을볕의 향기에 흠뻑 젖고

가을바람의 목소리를 품에 안으며

한 자락 빨래가 되어 하늘거리고 싶은

상냥한 가을 오후~


젖은 빨래일 때는

물기 머금고 축 늘어져 있다가

보송 햇살에 가느스름 눈을 뜨고

눈 시린 햇살 따방싯 웃어보기도 하고

가을의 향기 품고 다가서는

바람결 따라 나풀대다가 지칠 즈음

고개 들어 파란 하늘 보며 

잠시잠깐 나른한 낮잠에 빠져들면

보송보송 말라가는 동안

고운 꿈 한 조각 꿀 수 있으니~


바사삭 소리 나는 가을볕도 되어보고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하며

정처 없이 떠도는 바람의 마음을 닮아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고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한 줄기 자유로움이 되기도 하면서

그러다 아뿔싸~


제아무리 나풀대보아도 그뿐

촉촉 젖은 빨래일 때는 물론이고

눈부시게 말라 더욱 새하얘진 후에도

여전히 빨래집게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는

빨래자릭의 체념을 배우기도 하는

맑고 곱고 그리운 이 가을날


가을볕의 향기 머금고

빨랫줄에 걸린 빨래 한 자락이다가

어쩌다 운 좋게 빨래집게 살며시 풀어져

나풀나풀 바람 여행 떠날 수 있다면

... 좋으리


휘리릭 날다가

꽃무릇 붉은 이파리 그윽한

고운 이의 꽃밭에 살며시 내려앉아

가을바람의 목소리 닮은

새하얀 그리움 한 자락이 될 수 있다면

...  또한 좋으리


꽃구경도 잠시

짓궂은 바람 한 줄기에 그만

꽃밭 옆으로 날아가 툭 떨어져

꽃길 걷는 누군가의 무심한 발길에

걸릴 뻔한다 해도 어떠리


슬픔에 젖고

아픔에 구겨진 나일지라도

가을 한 뼘에 보송하게 말라

나비처럼 가벼이 날아올랐으니 충분하고

조심스레 비켜 지나가는 발걸음과

낯설지만 반갑게 인사 나눌 수 있을 테니

... 다행이리


내 안에 들어선 가을 한 뼘 덕분에

정겨운 가을볕 향기 품에 들이고

가을바람 목소리 정겹게 맞이하며

보송보송 상냥하게 웃을 수 있으면

... 그 또한 다행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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