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594 가을 한 뼘 덕분에
보송하고 상냥하게
덥석 손 내밀어 마주 잡고 싶은
기분 좋은 바람이 지나가고
가슴 가득 끌어안고 싶도록
보송하고 상냥한 햇살 머무르는
새하얀 빨래들 사이에서
나도 한 자락 빨래가 되어
깃발처럼 나부끼고 싶어요
바람이 부르는 노랫말에는
반짝이는 그리움이 맺혀 있고
햇살이 흥얼대는 노랫가락마다
해맑은 슬픔이 묻어있지만
가을볕의 향기에 흠뻑 젖고
가을바람의 목소리를 품에 안으며
한 자락 빨래가 되어 하늘거리고 싶은
상냥한 가을 오후~
젖은 빨래일 때는
물기 머금고 축 늘어져 있다가
보송 햇살에 가느스름 눈을 뜨고
눈 시린 햇살 따라 방싯 웃어보기도 하고
가을의 향기 품고 다가서는
바람결 따라 나풀대다가 지칠 즈음
고개 들어 파란 하늘 보며
잠시잠깐 나른한 낮잠에 빠져들면
보송보송 말라가는 동안
고운 꿈 한 조각 꿀 수 있으니~
바사삭 소리 나는 가을볕도 되어보고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하며
정처 없이 떠도는 바람의 마음을 닮아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고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한 줄기 자유로움이 되기도 하면서
그러다 아뿔싸~
제아무리 나풀대보아도 그뿐
촉촉 젖은 빨래일 때는 물론이고
눈부시게 말라 더욱 새하얘진 후에도
여전히 빨래집게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는
빨래자릭의 체념을 배우기도 하는
맑고 곱고 그리운 이 가을날
가을볕의 향기 머금고
빨랫줄에 걸린 빨래 한 자락이다가
어쩌다 운 좋게 빨래집게 살며시 풀어져
나풀나풀 바람 여행 떠날 수 있다면
... 좋으리
휘리릭 날다가
꽃무릇 붉은 이파리 그윽한
고운 이의 꽃밭에 살며시 내려앉아
가을바람의 목소리 닮은
새하얀 그리움 한 자락이 될 수 있다면
... 그 또한 좋으리
꽃구경도 잠시
짓궂은 바람 한 줄기에 그만
꽃밭 옆으로 날아가 툭 떨어져
꽃길 걷는 누군가의 무심한 발길에
걸릴 뻔한다 해도 어떠리
슬픔에 젖고
아픔에 구겨진 나일지라도
가을 한 뼘에 보송하게 말라
나비처럼 가벼이 날아올랐으니 충분하고
조심스레 비켜 지나가는 발걸음과
낯설지만 반갑게 인사 나눌 수 있을 테니
... 다행이리
내 안에 들어선 가을 한 뼘 덕분에
정겨운 가을볕 향기 품에 들이고
가을바람 목소리 정겹게 맞이하며
보송보송 상냥하게 웃을 수 있으면
... 그 또한 다행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