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unring Nov 19. 2023

초록의 시간 622 잠시 쉬어가요

서두르지 말아요

첫눈은 온다고 말로만 종알대다가

어딘가에서는 눈앞이 안 보이도록

날리고 날리고 또 날렸다는데

동네는 과감히

노룩패스~

그리하여 첫눈 구경은

쌀알만큼도 못하고

실컷 바람만 맞았습니다


대신 초승달이 나를 보러 찾아와

창문 밖을 서성입니다

실눈 같은 달이다가 눈썹달이다가

새초롬 곱디고운 초승달이 

짧기만 한 겨울해가 채 지기도 전에

동쪽 하늘에 급히도 떠올랐다가

숨바꼭질이라도 하듯이

어디론가 서둘러 가버렸어요


곱고도 예쁘고 사랑스러운 달님이

참 성질도 급하다고 중얼거리다며

고개를 돌려보니 사라진 게 아니라

조각배 되어 남쪽 하늘을

잰걸음으로 흘러가고 있네요


서쪽하늘을 향해 떠가는 동안

밤바람이 차가우니 달님도 잠시

추위를 피해 가면 좋을 텐데

내어드릴 방석이 없어서

그저 바라만 봅니다


버스 정류장 근처에

투명 비닐로 만든 공간이 있고

추위를 잠시 피해 가라고 쓰여 있던데

분주한 사람 대신 한가로운 낙엽들이

옹기종기 쉬어가는 모습이

쓸쓸하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했어요


달님도 거기 잠시 쉬어가면 좋을 텐데

추위도 피하고 낙엽들도 감싸 안으며

포근 달빛 달달하게 머물면 좋으련만

겨울을 마중하는 종종걸음

잠시 쉬어가시라~ 붙잡고 싶으나

달님도 바쁘실 테니 망설입니다


달님은 서성이고 나는 망설이고

그것도 쉼이라면 잠시잠깐의 쉼일 테니

서두르지 말고 우리 잠시 쉬어가요

겨울이 오고 한 해가 기울어도

우리 삶은 변함없이 흐르고

 한결같이 이어질 테니~

작가의 이전글 초록의 시간 621 엄마표 또 김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