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667 라푼젤 이야기
한 달 한정입니다
동생이 라푼젤이 되었어요
한 달 한정 라푼젤이랍니다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진 것도 아닌데
꽃다운 나이 낭랑 18세가 지난 지
한참 오래되었는데
갑자기 웬 라푼젤?
'엄마는 다 알아
엄마 말을 들어야 해
엄마가 제일 잘 아니까'
심리적으로 간섭하고 통제하는
마녀 고델이 있는 것도 아닌데
뜬금없이 웬 라푼젤?
십몇 층에 사는 동생네 아파트
엘리베이터 바꾸는 공사 중이랍니다
소리가 엄청 시끌벅적한 건 기본이고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일이
장난 아니랍니다
철 모르는 어린아이들은 날아오르고
철부지 젊은이들은 뛰어오르는데
어리지도 젊지도 않으니
하루 한 번 오르내리는 것도 힘겨워
몇 층마다 하나씩 놓여 있는 쉼 의자에
잠시 앉아 쉰다며 웃어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더도 말고 한 달 한정이니까요
줄곧 높은 탑에 갇혀 지내던
라푼젤이 들으면 흥칫뿡~ 하겠죠
한 달 동안 잘 참고 견디면
저절로 계단 오르내리기 운동도 되고
곧 새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는데
그까이꺼~ 하면서 흥칫뿡
독일의 설화를 바탕으로 정리했다는
그림 형제의 동화 '라푼젤'에서
마녀 고델은 라푼젤의 긴 머리카락으로
자신의 젊음과 미모를 지키기 위해
라푼젤을 18년 동안 높은 탑에 가두어 둡니다
탑 밖의 세계는 몹시 무섭고 위험하다고
라푼젤을 가두고 외출 금지령을 내립니다
이불 밖은 위험해~ 의 탑 버전인 거죠
마녀의 가스라이팅인 셈인데
그러나 바깥세상을 향한 라푼젤의
호기심과 궁금증까지 억누를 순 없죠
보이지 않는 폭력을
'가스등 효과'라고 한답니다
잉그리드 버그만이 출연한
영화 '가스등'에서 유래했다고 해요
부자 상속녀인 그녀의 재산을 가로채려고
남편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구속하고 조종합니다
사랑과 친밀감으로 이루어진
두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데
무늬만 사랑일 뿐
심리적으로 조종하고
조종당하는 관계가 되풀이되는 거죠
엘리베이터 공사에서
높은 탑에 갇힌 긴 머리 라푼젤
그리고 잉그리드 버그만의 영화까지
생각이 널을 뛰듯 오르락 내리락입니다
그러나 나는 변함없이
지금 여기
창밖의 겨울햇살 눈부시게 펼쳐지듯
남은 시간들도 환하고 평온하기를
다가오는 모든 일들이
해피엔딩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