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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ring Feb 26. 2024

초록의 시간 704 무세수의 날

게으른 날

미인은 잠꾸러기라는데

밤새워 책 읽고 늦잠으로 늘어지며

그까이꺼 외모 따위 관심 1도 없던

철부지 시절에도 이미

미소녀는 분명 아니었어요


예쁘면 용서가 되는 일이 제법 많은

예쁨 추구 세상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이왕이면 예쁘고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미인 어른이 되고도 싶었으나

어릴 때 저절로 쏟아지던 늦잠이

다 어디로 달아나버렸는지

늦잠은 도무지 실천 불가능한 

나이가 되고 말았어요


그저 뒹구르르 굴러만 다니는

게으른 날에는 과감히

세수를 생략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친구 말에 따르면

게으를수록 피부에 좋다고 하거든요


일주일에 하루쯤은

무세수의 날로 정해 놓고

반드시 실천하고야 말아요

물론 집콕 방콕이 옵션입니다


평소에도 게으르니

화장이나 꾸미는 것도 귀찮고

얼굴에 무얼 바르는 것도 번거로워

쓱삭 비누 세수 대충 로션 바르면 끄읕

그나마 하루는 그마저도 안 하는

무세수의 날인 건데요


무슨 배짱 또는 터무니없는 근자감으로

꾸밀 줄도 모르고 애써 꾸미지도 않는

이런 내가 답답하고 한심했던지

제발 선크림이라도 바르고 다니라고

폭풍 잔소리 건네 동생이

선크림은 좋은 걸로 써야 한다며

비싼 선크림 하나 무심히

내려놓고 갑니다


며칠 후에는

오다 주웠다~ 는 듯

마스크에도 묻어나지 않는

뽀샤시 크림이라며

크림 하나를  건넵니다


무세수의 날이지만

동생이 준 크림이라도

성의를 봐서 한번  발라줄 하고

대체 무슨 크림인지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대충 영양크림이려니 하고는

손등에 덜어 발라봅니다


거울도 띄엄띄엄 보는 나라서

얼굴에 뭔가를 바를 때도 얼렁뚱땅

우두커니 먼 산 보며 바르거나

별 쓸데없는 생각으로 가득한

잔머리 굴려대며 바르거든요


그런데요

아뿔싸~ 손등을 보니 허옇습니다

그제야 냉큼 일어나 거울을 보니

허연 분장이라도 한 듯

얼굴이 새하얘요


집 밖에 나갈 것도 아닌데

느닷없이 하얗고 뽀샤시한 얼굴이라니

그제서야 크림 상자적힌

깨알 같은 어쩌고 저쩌고~ 를

눈 크게 뜨고 읽어보았죠


스스로 기계치라고 하면서

전자제품 사용 설명서 따위

눈으로 스리슬쩍

건성으로 건너뛰거든요

뭐 그리 복잡한 설명이 구구절절

주의사항도 줄줄이 사탕

그러니 과감하게 건너뛸 수밖에요


그런 못된 버릇으로

화장품 안내문도 읽는 둥 마는 둥

느닷없이 세수도 안 한 얼굴에

피부톤을 환하게 해주는 

크림을 덥석~


그래서 편하게 늘어지는

무세수의 날에

연거푸 비누 세수를

두 번씩 하고야 말았습니다

허연 얼굴로 잠들 순 없으니까요


꿈에 하얀 꼬마 유령 

캐스퍼가 스르르 나타나

나 잡아봐라 날아다니며

재미나게 함께 놀자고 하면

대략 난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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