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초록의 시간 741 꽃보다 연두

예의와 친절 사이

by eunring

우리 아파트 바로 옆길에도

짤막하지만 아늑하고 고즈넉한

벚꽃길이 수줍게 숨어 있어요


바람이 하늘하늘 벚꽃비를 날려주는

그 길에 서면 생각나는 친구가 있어서

나무 아래 수북이 내려 쌓인

연분홍 벚꽃이파리들을 찍어

그리움의 향기와 함께

친구에게 날려 보냅니다


지금 벚꽃비~

내 문자에 날아온 친구의 답은

그때가 좋았어요

그 순간이 그립습니다~


그때가 좋았다는 것을

나 역시 몰랐습니다

늘 이웃에 있으니

그대로 있으려니 생각했었죠

모든 순간이 붙박이가 아님을

그땐 미처 알지 못했고

나 역시 그 순간들이 그립습니다


친구 몫까지 한 번 더

벚꽃길을 걸으며 꽃비를 맞고는

파르르 따라온 분홍 이파리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어요

공동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시 망설입니다


엘리베이터 문 열림 버튼을 누르고

지금 들어서는 누군가를 기다려야 할까

아니면 문이 닫히는 대로

그냥 두어야 할까


지금 들어서는 그 누군가가

굳이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운동 삼아 비상계단을 이용할 수도 있고

다시 밖으로 되돌아 나갈 수도 있고

천천히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수도 있는데

문 열림 버튼을 누르고 기다려야 할까

닫히는 대로 그냥 올라가야 할까


그냥 문이 닫히기를

잠시 기다리는 건 예의

일부러 문 열림을 누르고

기다려 주는 것은 친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활짝 눈부시게 피었다가

꽃비 내리며 떨어지는 꽃이 친절이라면

꽃 진 자리에 비죽 돋아나는

초록 잎사귀들은 예의겠죠


친절보다는 예의가

잔잔하고도 한결같은 마음이듯

피었다 후르르 지는 꽃보다

지금부터 푸르러지는 잎사귀들이

더 아름답고 싱그럽게 오래갑니다


봄꽃 필 때 보자 했으나

꽃은 금방 이울어

벚꽃비 날릴 때 만나지 못한 친구

신록 아래서 만나는 것도

우정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에

다시 톡 문자를 보냅니다


이번엔 미루지 말고

얼굴 봐요~

꽃보다 연두일 때

연두가 더 진해지기 전에 만나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초록의 시간 740 라라라 라일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