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로하다 97 마음의 휘핑크림

마음과 커피의 휘핑크림

by eunring

얼마 전 우연히

티비 채널을 돌리다가

빨강머리 앤이 나오기에

잠깐 마음을 빼앗겼다


영화는 거의 끝 무렵이어서

빨강머리 앤이 다시 돌아와

가족 성경에 자신의 이름을 적으며

감동스러워하는 모습이

다시 보아도 뭉클했다


빨강머리 앤의 갈래 머리처럼

갈래 머리를 하던 소녀시절

초록지붕은 아니지만

푸르른 건물에 살던 친구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빨강머리 앤처럼 갈래 머리였지만

부모님 계시고 언니와 오빠도 있고

덤으로 귀여운 여동생도 있는

명랑하고 밝고 복 많은 소녀였다

그 친구의 집에 놀러 가면

가족의 화목함이 기분 좋은 향초 향처럼

온 집안에 따스하게 스며 있었다

친구 언니가 만들어주던

갓 구운 빵의 폭신한 부드러움이

아직도 손 끝에 포근하게 느껴진다


그 친구와 얼마 전 문자를 나누었는데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된다고 했다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마음이 뒤죽박죽이라고

마음을 조절하는 힘이

아무래도 부족한 모양이라는

친구의 말이 앙금처럼 마음에 남아 있다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바로 우리 마음 아니던가

마음대로 되면 그게 어디 사람의 마음이랴

신의 마음이거나 천사들의 마음일 것이다


언제였던가

오래전 철없이 어리던 시절에

그 친구는 주머니에 동전 몇 개만 넣고

신나게 돌아다니고 싶다고 했었다

내 기억 속 그녀는

커피 위에 덮인 휘핑크림처럼

희고 보드랍고 자유로운 소녀였다


누군들 어딘가에 묶이고 싶겠는가

더구나 자신의 마음에 휘감기고 싶겠는가

그러나 누구든 한 번쯤은

옴짝달싹 못하는 시간들이 있다

스스로 마음을 휘감는 순간들이 있다


휘핑크림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내 마음이 나를 부드럽게 감싸는

휘핑크림이라고 생각하고

천천히 한 모금 마셔보면 어떨까

달콤하고 로맨틱하고 부드러운 생크림을

드라마의 여주인공처럼 입술에 묻히고

커피의 기분 좋은 쓴맛에

마음을 맡겨보는 어떨까

그냥 나를 내맡겨보는 어떨까


그 친구와 함께

아인슈페너 한 잔 마셔야겠다

뜨거운 커피를 흰구름처럼 덮고 있는

몽글이 생크림으로 마음을 적셔봐야겠다

그리고 말없이 웃어주고 싶다

오래전 그녀가 나를 향해

햇살처럼 웃어주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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