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872 참 예쁜 지금의 너
단풍잎보다 고운 너에게
나도 그랬어요
한참 오래전 항암치료받던 중에
푸석푸석 윤기를 잃어가던 머리카락이
우수수 가을 낙엽처럼 쏟아져 내리던
슬프고 아픈 기억이 있어요
잠 안 오는 스산한 밤
베개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주우며
뜨거운 눈물방울 또르르
마음이 폭삭 무너져 내려앉던
그런 기억이 있어요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내리면
손가락을 타고 머리카락들이
힘없이 줄줄이 따리 내려와
마음이 철렁해지던
그런 순간들이 있었죠
거울을 보지 않았어요
머리카락만 빠진 게 아니라
눈썹도 휑하니 비어버린 내 모습이
맨숭맨숭 눈썹만 모나리자를 닮아
한없이 낯설고 서먹했으니까요
분명 나인데
내가 아닌 듯 낯선 시간들이
한참 이어지고 또 흐르고
그렇게 살아남았죠
그럼요
가발도 써 보았어요
어색하고 또 이상하고
불편하고 무척 갑갑했으나
그렇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그냥 웃어넘겼어요
그랬어요
이도저도 다 불안한 마음에
혼자서는 동네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길을 건너려고 건널목에 설 때마다
신호등을 바라보며 조바심을 내던
그런 시간들도 살아냈어요
그리고 이렇게
살고 있어요
스스로 대견하다고 다독이고
참 기특한 나라고 으쓱거리기도 하고
느닷없이 실실 웃기도 하며
이렇게 살고 있는 나
그리고 그대~
좋잖아요
이렇게 살며 숨도 쉬고
하늘도 바라보고
또 한 계절을 맞이하고
길고 먼 여행은 어려워도
동네를 마구 쏘다닐 수 있고
바스락 낙엽길도 걸어볼 수 있으니
살아 있다는 건 참 좋은 거죠
그런데요
그대에게 난 졌어요
전신마취 두 번을 겪은 나보다
더 젊고 여리고 예쁜 그대가
세 번 경력이라니~
미안해요
카페라떼가 맛있는 카페에 가서
그대를 위한다며 카페라떼를 건넸던
그 미안함이 새삼 되살아나서
거듭 미안한 마음이 되네요
항암치료를 받아본 이들은 다 알죠
입덧이라도 하듯 속이 뒤집혀 울렁일 때
개운하기는 아메리카노가 정답인데
내 생각이 짧고 부족했어요
몽그르르 예쁜 하트가 그려진
카페라떼를 한 모금 마시다가
슬며시 밀어놓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지금 참 예쁜 그대
씩씩하게 살고 있는 너~
크고 깊고 묵직한 아픔을 겪었으니
그만큼 더 잘 살아갈 수 있어요
흘린 눈물만큼 웃을 수 있어요
그럼요
한여름 더위와 뜨거움을 견디며
소낙비의 소란함도 겪어내고
붉게 물든 단풍잎보다 더
곱고 사랑스러운 그대
참 예쁜 지금의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