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877 우정의 호수 한 바퀴
기억의 걸음걸음
그대는 기억하려나요
한참 오래전 이맘때
아픈데도 병원 가는 걸 미루고
미련스럽게 나는 가을놀이를 갔어요
늦가을 호수 한 바퀴를 빙 도는데
아파서 빨리 걸을 수도 없었죠
그때 그대가 길동무가 돼주었어요
차분히 천천 걸음으로 느리게
함께 걸어주는 그대가
참 고마웠어요
덕분에 호수 한 바퀴를
빙그르르 다 돌 수 있었죠
어느 호수였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그 사이 전신마취를 한 번 하고
다시 새롭게 태어난 셈이라
그 이전의 기억들은 바스락거리고
전생의 일들인 듯 아스라해졌으니까요
그래서 그냥 내 맘대로
우정의 호수라 부르기로 합니다
늦가을날 우정의 호수 한 바퀴를
함께 천천히 걸어주던 그대가
맛은 보장할 수 없으나
정성은 보장한다는
귀한 김치 한 통을 보내주어서
늘 남의 손 김치만 먹고사는 내게
정중한 배꼽 인사와 함께
감사 미소를 머금게 했어요
엄마손 김치는 졸업한 지 이미 오래
꽝손에 입맛도 제대로가 아니라
바로 먹을 땐 ○○김치
좀 익혀 먹을 땐 ○○김치
김치찌개를 해 먹을 땐 ○○김치
남의 손 김치에 기대어 산 지
부끄럽고 민망하게도
한참 되었는데요
아는 맛이 더 무섭다고 하잖아요
그만큼 귀하다는 말이겠죠
딱 그대를 닮아 깔끔하고
알싸하고도 시원 칼칼한 맛이
기억 속을 맴돌다가 툭 비집고 나와
입안이 벌써 개운해졌어요
옛이야기에 나오는 도깨비들은
받은 건 쿨하게 잊고
받을 것만 알뜰히 기억한다는데
나는 영리한 도깨비가 아니라
받은 것만 기억에 선명히 남아
언젠가 먹었던 납작납작 무김치가
참 시원하고 깔끔하고 개운하게
느끼한 속을 잡아주던 생각이 나서
먹기도 전에 중얼거렸어요
아 그 맛~
그리고 또 생각나는 고마움이
하나 더 있어요
기차여행 중에 그대가 내민
물 한 잔의 따스함이
그 순간 참 고마웠어요
찬물 아닌 따뜻한 물을 마시느라
쪼매난 텀블러 하나 넣어 다니는데
그마저도 무겁고 번거로울 때가 있거든요
마음 담긴 물 한 잔의 따스함이
오래 기억에 남아 있어요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그 사이에 그대도
비슷한 아픔을 겪었는데
살갑게 살피지 못했어요
어머나 너도 아팠니
나도 아팠다
나만큼 너도 아팠구나
나도 너처럼 아팠는데~
세상에서는 이런 위로를
네 글자로 말하죠
동병상련(同病相憐)
간단 네 글자에 담긴
같은 아픔이라는 위로만큼
맘 편하고 정겹고 따스한 한마디는
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가보지 않은 길은 짐작만 할 뿐
도무지 어떤 길인지 알 수 없으니까요
모두가 피하고 싶은 길
그러나 누군가는 가게 되는 길
바라지도 원하지 않았으나
도망치지도 못하고 다녀온 길
깊숙한 암담함을 견디며
낯선 그 길을 걷느라 애쓴 그대
눈웃음이 더 깊어지고
미소가 한결 상냥해진 그대에게
새삼 고마움의 인사를 전합니다
우린 알고 있어요
아픈 만큼 성장하고
상처만큼 더 깊어진다는 걸~
그래서 지금 이 순간
꽃보다도 더 활짝 웃을 수 있죠
이렇게 살아있음이
그 무엇보다 눈부신 기쁨이란 걸
힘겹게 또박또박 다녀온 그 길에서
제대로 알고 느끼고 배웠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