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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ring Nov 30. 2024

초록의 시간 877 우정의 호수 한 바퀴

기억의 걸음걸음

그대는 기억하려나요

한참 오래전 이맘때

아픈데도 병원 가는 걸 미루고

미련스럽게 나는 가을놀이를 갔어요


가을 호수 한 바퀴를 빙 도는데

아파서 빨리 걸을 수도 없었죠

그때 그대가 길동무가 돼주었어요

차분히 천천 걸음으로 느리게

함께 걸어주는 그대가

고마웠어요


덕분에 호수 한 바퀴를

빙그르르 다 돌 수 있었죠

어느 호수였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그 사이 전신마취를 한 번 하고

다시 새롭게 태어난 셈이라

그 이전의 기억들은 바스락거리고

전생의 일들인 듯 아스라해졌으니까요


그래서 그냥 내 맘대로

우정의 호수라 부르기로 합니다

가을날 우정의 호수 한 바퀴를

함께 천천히 걸어주던 그대가

맛은 보장할 수 없으나

정성은 보장한다는

귀한 김치 한 통을 보내주어서

늘 남의 손 김치만 먹고사는 내게

정중한 배꼽 인사와 함께

감사 미소를 머금게 했어요


엄마손 김치는 졸업한 지 이미 오래

꽝손에 입맛도 제대로가 아니라

바로 먹을 땐  ○○김치

좀 익혀 먹을 땐 ○○김치

김치찌개를 해 먹을 땐 ○○김치

남의 손 김치에 기대어 산 지

부끄럽고 민망하게도

한참 되었는데요


아는 맛이 무섭다고 하잖아요

그만큼 귀하다는 말이겠죠

딱 그대를 닮아 깔끔하고

알싸하고도 시원 칼칼한 맛이

기억 속을 맴돌다가 비집고 나와

입안이 벌써 개운해졌어요


옛이야기에 나오는 도깨비들은

받은 건 쿨하게 잊고

받을 것만 알뜰히 기억한다는데

나는 영리한 도깨비가 아니라

받은 것만 기억에 선명히 남아

언젠가 먹었던 납작납작 무김치가

참 시원하고 깔끔하고 개운하게

느끼한 속을 잡아주던 생각이 나서

먹기도 전에 중얼거렸어요

아 그 맛~


그리고 또 생각나는 고마움이

하나 더 있어요

기차여행 중에 그대가 내민

물 한 잔의 따스함이

 순간 참 고마웠어요

찬물 아닌 따뜻한 물을 마시느라

쪼매난 텀블러 하나 넣어 다니는데

그마저도 무겁고 번거로울 때가 있거든요

마음 담긴 물 한 잔의 따스함이

오래 기억에 남아 있어요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그 사이에 그대도

비슷한 아픔을 겪었는데

살갑게 살피지 못했어요

어머나 너도 아팠니

나도 아팠다

나만큼 너도 아팠구나

나도 너처럼 아팠는데~


세상에서는 이런 위로를

네 글자로 말하죠

동병상련(同病相憐)

간단 네 글자에 담긴

같은 아픔이라는 위로만큼

맘 편하고 정겹고 따스한 한마디는

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가보지 않은 길은 짐작만 할 뿐

도무지 어떤 길인지 알 수 없으니까요


모두가 피하고 싶은 길

그러나 누군가는 가게 되는

바라지도 원하지 않았으나

도망치지도 못하고 다녀온 길

깊숙한  암담함을 견디며

낯선 그 길을 걷느라 애쓴 그대

눈웃음이 더 깊어지고

미소가 한결 상냥해진 그대에게

새삼 고마움의 인사를 전합니다


우린 알고 있어요

아픈 만큼 성장하고

상처만큼 더 깊어진다는 걸~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보다도 더 활짝 웃을 수 있죠


이렇게 살아있음이

그 무엇보다 눈부신 기쁨이란 걸

힘겹게 또박또박 다녀온 그 길에서

제대로 알고 느끼고 배웠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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