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초록의 시간 942 라일락 비에 젖을 때

명랑과 우울 사이

by eunring

연보라 라일락 비에 젖을 때

아련히 떠오르는 풍경이 있어요

8층 전망 좋은 방에서는

바로 아래 공중 정원이 내려다보이고

보랏빛 라일락꽃이 그림처럼 피어났어요


전망 좋은 방 창가에는

철부지 명랑 환자가 있었고

그 곁에는 어리광쟁이

우을 환자가 있었어요

커튼으로 서로를 가려놓아

얼굴을 마주할 기회는 드물었으나

목소리는 들을 수 있었죠


방이 아닌 병실

전망 좋은 병실 창가에는 명랑 환자

바로 곁에는 우울 환자가 있었던 건데요

명랑 환자는 상황이 번거로움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으니 차라리 웃자~

명랑 환자가 되기로 작정을 한 거죠


완전 쫄보에 겁쟁이지만

달아나지 못하고 어차피 마주할 거라면

뒷걸음질도 칠 수 없을 바에야

그래도 웃어보자고 다짐을 하고

웃으며 명랑 환자가 되자~

웃픈 마음을 먹었던 거죠


바로 이웃 우울 환자는

백일 것 지난 어린 아가를

집에 두고 온 어리디어린 엄마였는데

아기랑 영상 통화를 하며

훌쩍거리기 일쑤였어요


철부지라도 엄마는 엄마라서

아기 이름을 부르며 애써 웃다가도

울기 시작하는 아기를 달래다가

엄마도 따라 울먹울먹~

커튼으로 가려져 있지만

안타까운 풍경이 눈에 선했어요


어린 인생 첫 아픔이라 그런지

아프다고 징징대다가는

입맛이 없다며 밥도 잘 먹지 않아

의사 선생님의 걱정 어린 말씀이

종종 들려오기도 했어요


집에 돌아가 아기 돌보려면

밥을 잘 먹어야 한다고 다독이시는데

철부지 어린 엄마는 우울하다고

먹고 싶지 않다며 또 훌쩍~


그래도 엄마는 엄마였어요

먼저 퇴원한다며 인사를 하기에

애썼다고 더는 아프지 말라고

배웅하는 명랑 환자에게

어린 엄마는 배시시 웃으며

기특한 한 마디를 남겼답니다


집에 가서

아기 잘 키워야죠~

우울하다며 징징대던 모습은 어디 가고

야무진 한 마디를 남기고 돌아서는

앳된 뒷모습에 엄마라는 이름표가

단단히 ~ 붙어 있어서

사랑스럽고 고마웠어요


그럼요

세상에 우울한 환자는 있어도

우을한 엄마는 없으니까요

몸이 아픈 엄마는 많아도

마음까지 아픔에 꺾이는

여린 엄마는 없으니까요


세상의 모든 엄마들은

혼자 있을 때 우울하다가도

자식 앞에만 서면 햇살처럼 환하

자식을 향해 가는 엄마의 발걸음은

꽃길 아닌 바람길이라도

언제나 힘차고 씩씩한 거죠


누가 뭐래도

엄마는 엄마니까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초록의 시간 941 강가의 햇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