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엄마 같은
무늬만 명랑모드였으나
어쨌든 철부지 명랑 환자였을 때
운동 삼아 병동 복도를 산책하다가
휴게실에 잠깐 앉아 쉴 때였어요
환자복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흙부스러기 묻은 뭉툭한 작업화를 신고
자판기 앞을 한동안 서성이며
이 버튼 저 버튼 눌러보다가는
휴대폰을 꺼내 들고
목소리 쩌렁쩌렁 할아버지 환자가
엄마랑 통화를 하기 시작했어요
할아버지 목소리가 우렁우렁한데
휴대폰 볼륨을 최대한 높여 놓았는지
상대방 할머니의 목소리까지
스피커폰처럼 들려와서
일부러 들으려고 한 것도 아닌데
어쩌다 통화 내용을 다 듣게 되었거든요
나 많이 아팠다
얼마나 아팠는지 모른다~
엄마에게 응석이라도 부리듯이
할아버지가 말씀하시자
쯧쯧~ 얼마나 많이 아팠느냐고
할머니가 안타까워하십니다
애썼다~고
애 많이 쓰고
잘 참았으니 장하다~고
쓰담쓰담해 주시는 목소리가
딱 아들내미 달래는 엄마였어요
처음엔 그랬어요
할아버지가 엄마에게
어리광 전화를 하시는 거라고
분명 그렇다고 생각했는데요
들려오는 대로 얻어 듣다 보니
할아버지의 엄마가 아닌
할아버지의 아내였던 거죠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아픔을 하소연하시는 할아버지를
어린아이 달래듯 그래그래 그랬구나~
포근하게 다독이시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봄볕처럼 따사롭고 다정해서
마음이 잔잔히 일렁였어요
편한 슬리퍼가 필요한데
근데 지하철 타고 여기 올 수 있겠나~
할아버지의 물음에
할머니의 대답은 단호했어요
나 못 간다~
혼자 지하철 못 타~
그래그래 혼자 못 오지~
고개 끄덕이며 할아버지가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슬리퍼 없음 어때
기다려 내가 갈게
곧 갈 테니 기다리고 있어~
알았다고 할머니가 웃으십니다
다 나어서 얼른 와라~
편한 신발보다 더
편하고 좋은 친구 같은 아내
때로는 엄마 같은 아내가 있으니
슬리퍼 따위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신발 그냥 신어도 된다며
허허 웃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든든하고 기분 좋게 들려와서
행복한 할아버지 환자라고 중얼거리며
혼자 흐뭇 미소 머금었는데요
통화를 마친 할아버지가
자판기 음료수 하나를 빼 들고는
병실로 돌아가시는 뒷모습이
흙부스러기 묻은 투박한 작업화처럼
거침없이 당당하고 씩씩해서
한참 동안 바라보았어요
환자복 소매 끝에 맺힌 핏방울까지도
봄날의 꽃물인 듯 고와 보이고
할아버지의 몸에 주렁주렁 매달린
수액 줄의 불안한 흔들림까지도
불편하기보다는 오히려 유쾌해 보였으니
참 행복한 환자임이 분명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