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뼘 판타지 055 고이 보내드림

빨간머리 영영이 마음

by eunring

아빠가 그러셨어요

만남과 헤어짐은

같은 길 위의

서로 다른 방향이래요

마주 보면 만남이고

돌아서면 작별이래요


함께 하는 것도 사랑이고

보내주는 것도 사랑이래요

영영이의 손을 놓은

엄마의 마음도 사랑이고

영영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붙잡은

아빠의 마음도 사랑이래요


영롱 할머니가 떠나실 시간이

안타깝게 다가오는데

그러나 영영이는

울지 않을 거예요


분홍 진달래 피는

아른 봄날이 아니라

가시는 걸음걸음

사뿐히 즈려 밟으시라고

진달래꽃을 송이송이

향기로이 뿌려드리지는 못하지만

울며불며 붙잡지는 않을래요


가지 마시라

내 곁에 계시라고

붙잡고 매달리다가

영롱 할머니의 여린 팔이

아프게 빠지시면 안 되니까요


작별의 시간을 위해

빨간머리 영영이가 되고 싶어요

은발의 영롱 할머니 곁에는

빨간머리 영영이가 어울릴 것 같아요


멀고 낯선 길을 날아와

영영이 핑디와 놀아주시느라

은발이 되신 영롱 할머니를 위해

영영이도 뭔가 하나쯤은

다르게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빨간머리 영영이가 되어

은발의 영롱 할머니 손을 잡고

키다리 카페에 가고 싶어요

그 카페에는 빨간머리 앤이 있거든요


빨간머리 앤 그림 아래

편안하고 아늑하고 푹신한 자리를

영롱 할머니에게 내드리고

연분홍 아줌마에게 배운

아직은 서툰 솜씨지만

어설픈 꼬맹이 하트가 그려진

따습고 고소한 카페라떼를

영영이가 만들어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작은 선물도 하나 준비했어요

나이가 들면 무얼 자꾸 손에서 놓치고

소소한 물건이나 자잘한 생각들이

숨바꼭질이라도 하듯이

숨기 시작한대요


머릿속에서 잊히고

지워지고 엉키고

아무때나 눈물이 주르륵

뜬금없이 밥알 하나를

옷섶에 흘리기도 한다며

지안이 할머니가 고운 전으로

매너스카프를 만들어 주셨거든요


아련한 느낌의

소녀 감성 레이스도 빙 두르고

목에 걸 수 있게 끈도 달아서

음식 먹을 땐 목에 두르고

무릎이 시릴 땐 무릎 위에 얹으면

레이스처럼 잔잔하고 기분 좋은

느낌이 스며든다고 하셨어요


글쿤요~ 나이 들면

어린아이가 된다는 말이

문득 떠올라서 쓸쓸한 마음이 들어요

밥알 흘리고 눈물 떨구고

지우고 잊고 잃어버리고

그래서 예쁜 매너스카프가

필요해지는 거래요


갑작 은발이 되신

영롱 할머니에게

꼭 필요한 아이템이니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아요


흘리기 쉬운 나이라

바람결에 흘려보내시더라도

놓치기 쉬운 나이라서

날아오르는 순간 놓치게 되시더라도

뭐 어때요~ 영영이의 마음만

잊지 않고 가시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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