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로하다 207 앉아서 산티아고
마음의 순례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고 싶었다
대신 마드리드 시티컵에 커피를 마신다
친구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사다준 스페인 머그잔이다
큼직하고 듬직한 머그잔에는
커피도 넉넉히 담기고
은총도 듬뿍 담긴다
게다가 머그잔 안쪽은
연하고 순한 초록빛이다
초록을 좋아하고 초록이 어울리는
그녀를 닮은 머그잔이다
커피의 향미와 초록의 향기가 만나서
행복 두 배 기쁨도 두 배가 된다
마드리드 머그잔에 커피를 마시며
그녀의 순례길을 따라가 본다
묵직한 배낭을 메고
멍들고 부르튼 발에는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채
운동화가 닳고 닳도록
어둑한 밤길도 걷고
부옇게 밝아오는 새벽길도 걷고
눈부신 한낮의 뜨거움도 견디었으리
해질녘이면
붉게 타오르는 석양을 바라보며
집 생각 가족들 생각도 참고 견디면서
묵묵히 은총의 길을 걷다가
잠시 머무른 마드리드에서
그녀가 사다준 큼직한 머그잔을
나는 은총의 잔이라고 부른다
그녀가 산티아고 순례를 떠날 때
나도 함께 가고 싶었다
그녀는 떠나고
나는 산티아고 영화로 아쉬움을 달랬다
그녀가 종종 보내주는 문자와 사진으로
마음의 순례를 함께 했다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그녀의 첫마디는
우리들 인생이 바로 순례길이라는
지금부터 새로운 인생의 순례가 시작된다는 나지막한 은총의 목소리였다
언젠가 산티아고 순례를 떠나는
은총의 시간을 꿈꾸며
지금은 앉아서 산티아고
마음만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돌려 본
시티컵 밑바닥에는
You are here이라고 쓰여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