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_3

끝나지 않은 길_ 묵시아, 피스테라(피니스테레)

by 은섬


산티아고 대성당을 마지막으로 순례를 마쳤지만 순례길의 끝에서도 뭔가 알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 이들이 있다면 산티아고 입성은 더 이상 마지막이 아니다. 묵시아와 피스테라(피니스테레) 길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야고보 사도는 세상 끝까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스페인에서 선교활동을 했지만 그 결과가 참담했다. 이방인들을 전교하지 못한 채 몸과 마음이 탈진한 야고보는 묵시아로 갔고, 그곳에서 계시를 받는다. 돌로 된 배를 타고 홀연히 나타난 성모님은 '너는 할 일을 훌륭히 다 마쳤으니 낙담하지 말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를 전했고, 야고보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순교로 신앙을 증거 하였다. 이 이야기는 전설로 전해지지만 실제로 묵시아 해변에서 돌로 된 배가 발견되었고 그곳에 성당이 지어졌다.


유럽인들이 '세상의 끝'이라 여겼던 땅을 갈리시아어로 피스테라 Fisterra, 스페인어로 피니스테레 Finisterre라 부르는데 라틴어의 '끝'이라는 Finis와 '땅'이라는 Terrae에서 유래했다. 야고보는 스페인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사람들은 박해를 피해 야고보의 유해를 나룻배에 실어 띄웠다. 그 배가 닿은 곳이 피스테라 해안이라고 한다. 순례자들은 땅 끝에 이르러 순례의 끝을 선언하면서 새로 태어난다는 의미로 낡은 옷과 신발을 태우는 세리머니를 치렀는데 지금은 환경보호와 안전을 위해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낡은 등산화 조형물이 세워졌다.


산티아고에서 버스를 타고 고작 2시간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피스테라지만, 묵시아를 거쳐 나흘간의 걷기로 까미노를 계속 이어갈 수도 있다. 이미 다 마치고 끝나버린 길이 새로운 시작이 된다. 순례의 연장선을 택한 이들에게만 며칠 더 걸을 수 있도록 허락된 특별 보너스인 셈이다. 나흘은 마치 이제까지의 고생을 보상하는 듯 스스로를 향한 대견함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시간이 될 것이다. 중간중간 세요를 받으며 걸으면 각각의 공립 알베르게에서 묵시아 순례 증서, 피스테라 순례 증서를 무료로 발급해 준다.


피스테라 공립 알베르게에서는 그곳의 공식 세요를 크레덴시알에 찍어주면서 그 옆에 한국인들에게만 '참 잘했어요' 한글 도장을 한 개 더 찍어준다. 많은 세요들 중에 어린 시절 학교에서 선생님께 받던 '참 잘했어요' 도장은 이 길 위에서 피스테라가 두 번째다. 첫 도장은 아스토르가 Astorga 산타 마리아 대성당 Catedral de Santa Maria 직전에 있는 알베르게였다. 이곳에서도 공식 세요를 찍어주고 바로 그 옆에 한국인들에게만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준다.

알베르게에 머물렀던 한 순례자가 순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간 후 추억을 떠올리며 '참 잘했어요' 도장을 우편으로 보냈고, 알베르게의 오스피탈레로는 순례자의 우정을 기리며 그 길을 걷는 다른 한국인 순례자들의 크레덴시알에 잊지 않고 그 도장을 찍어주는 것이다. 상상하지도 못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한 사람의 따듯한 마음으로 시작되었지만, 많은 한국인 순례자들이 길 위에서 친절과 공동체적인 형제애를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 도장 하나가 뭐라고... 그 도장을 받은 한국인은 모두가 하나같이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어 박수를 치며 웃는다. 서로가 나눈 작은 호의와 친절이 다른 순례자들에게 더 큰 기쁨으로 전해지는 것, 나는 이런 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이라 생각한다.


사람이 많지 않아 고즈넉한 해변을 품은 묵시아 Muxia는 새로 지은 공립 알베르게가 규모도 크고 시설이 좋다. 피스테라 곶에는 0Km(제로 킬로미터) 표지석이 있는데 땅 끝, 순례의 끝, 까미노의 끝이라는 표지석을 실제로 마주하면 여러 가지 복잡하고 묘한 감정이 든다. 산티아고 대성당의 화려함 속에 뭔가 허전하고 아쉬웠던 마음이 0Km 표지석을 보는 순간 '정말 이제 마지막이구나' 하는 안도와 충만함으로 바뀌면서 파도처럼 감정이 인다. 까미노에 숨겨진 보물 같은 묵시아-피스테라의 해넘이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묵시아의 바다와 순례증서


피스테라 0Km 표지석과 순례증서



대성당을 둘러싼 거리는 순례자들의 환호와 음악, 춤으로 가득하다. 함께 그 길을 걸은 동료 순례자들과의 축제를 뒤로하고 나 혼자만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새벽 찬공기를 들이마신다. 묵시아와 피스테라로 향하는 카미노는 내 순례길의 마지막을 장식할 화려하고도 애잔한 갈라쇼이자 에필로그다. 배낭은 무겁고 발걸음은 더디지만 아무도 없는 언덕 위에서 뒤돌아 본 대성당은 그저 고요하기만 하다. 산티아고 대성당의 찬란한 영광을 잠시 그곳에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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