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강릉

사임당과 난설헌, 여성

by 은섬


나는 강릉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소나무가 있는 아름다운 바다와 태백산맥으로 이어지는 대관령이 자리 잡은 강릉은 고택들이 자아내는 차분한 정취가 참 좋다.(경주도 애정 하는 곳 중 하나다.) 점점 강도가 높아져만가는 엄마의 히스테리를 감당하기 어려워 가슴이 타들어 갈 때면 시외버스를 타고 강릉에 다. 조용한 강릉은 늘 나에게 위로다.


강릉에는 사임당과 난설헌 생가가 있는데, 오죽헌은 워낙 유명해서 사람들이 많지만 난설헌 생가터는 찾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늘 난설헌 생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곳에 들어서면 꼭 시간의 문을 지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녀들의 삶은 어땠을까? 무엇이 그녀들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게 했을까? 세상에 알려진 그녀들의 이야기가 전부는 아닐 터이다. 그녀들의 삶은 서로 다른 듯 닮아있고, 닮은 듯 다르다. 특히 난설헌은 그 짧은 생을 외롭게 보냈고, 앞세운 자식들에 대한 한스런 모정을 시로 남겼다. 난설헌 시비가 세워진 오솔길을 걸으며 나는 늘 엄마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나를 향한 엄마의 폭언과 정신적 학대는, 엄마에게 난설헌의 시와 같은 거라고... 자식을 화풀이, 한풀이로 삼아서는 안되지만 지금 엄마는 너무 힘들고 아파서 나에게 그런 거라고... 남편 복 없어, 자식 복도 없다는 우리 엄마. 남편에 의해 행복이 결정되는 것이 여성의 삶일까...?

난설헌 생가_강릉시 홈페이지 www.gn.go.kr/tour/index.do


누군가의 소유격으로만 존재하는 여성이 아닌 온전한 나 자신으로서의 여성으로 살 순 없을까? 이러한 고민은 오래전 '왜 여성 앞에만 여성임을 나타내는 단어가 붙을까?'라는 단순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여류작가 여류화가 여배우 여교수 여의사 여가수 여기자 여사장...(예전보다는 사용 빈도가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존재하는 말이다.) 여류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전문적인 일에 능숙한 여자를 이르는 말.' 반의어는 '남성'이라 쓰여 있다. 남류란 단어는 애초에 없다. '전문적인 일에 능숙한 남자를 이르는 말'은 그냥 보편적인 남성이다. 보편의 남성은 누구나 전문적인 일에 능숙하여 따로 지칭할 단어가 필요치 않은가 보다. 직업 앞에 여성만이 자신이 여성임을 밝혀야 한다는 건 너무나 이상하다. 남류작가 남류화가 남배우 남교수 남의사 남가수 남기자 남사장이 없는 말이라면 여류작가 여류화가 여배우 여교수 여의사 여가수 여기자 여사장이란 말도 없어야 한다. '처녀작'이란 경악스러운 말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 당연하지만 현실에서 결코 당연하지 않은 이 주제를 가지고 대학시절 학생회 차원에서 포럼을 기획했었다. 관련 영화를 상영하고, 책과 그림을 전시하고, 인권과 성 전문가를 모셔 강연을 고, 학우들과 공개토론을 마련했다. 5일간의 포럼을 위해 꼬박 5개월을 준비하며 '자주 여성, 민주 남성'의 축제를 만들자고 신났던 우리는 남성 중심의 사회 인식과 무지, 무관심이라는 벽을 마주하며 많이 분노하고, 울었고, 결연했다.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미혼모들을 직접 만나 그녀들과 함께 고민을 나눴다. 수요집회를 함께하며 위안부 할머님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마디의 말로 그저 쉽게 치부되는 '낙태'가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것인지 현직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과 대담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남성이 할 수 없는 출산. 생명을 잉태하고 낳는 고귀한 여성의 몸은, 여성을 속박하는 굴레가 되어 고귀하지 않은 존재가 되게 하였다. 여성만이 할 수 있다 하여 그것이 여성의 전부는 아니다. 여성의 몸은 남성의 것 내지는 남성을 위한 것이라는 통념은 생각보다 넓고도 두터웠고, 높고도 깊었다.


'소유격으로의 여성'이 아닌 '자주 여성'이 된다는 것은 왜 당연한 것이 아닌 '투쟁'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해답을 찾을 수 없었고, 축제처럼 즐겁게 시작했던 준비과정에서 우리가 마주했던 한계와 절망을 느낀 순간들을 포럼의 마지막 학우들 앞에 솔직하게 고백했다. 앞으로 우리가 살면서 고민하고 헤쳐 나아가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고무적인 건 우리가 '민주 남성'이라 지칭한 학우들의 호응이다.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누나 여동생의 양보를 당연한 것으로 인식했던 것들을 되돌아보는 기회였다며 포럼을 준비한 우리들에게 많은 격려를 해 주었고, '민주 남성'으로 함께 하겠다는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었다.


20년도 훨씬 지난 오늘날 일부는 바뀌었고, 일부는 바뀌고 있으며, 일부는 그대로이고, 일부는 퇴보했다. 이번 대선, 정치권에서 이대남 이대녀 운운하는 것을 보고 화들짝 했다. 너무나 완벽한 퇴보다. 이것이 지도자라는 위치에 있는 이들의 생각과 말이라니...(되지못한 것이 엇나가는 짓만 한다는 옛 말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남성, 여성의 편 가르기가 아니라 지금의 우리와 미래 세대를 위한 연대, 존중,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그들이 아닐 것이다. 민생을 살펴야 할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정치생명만을 위해 썩은 고기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판세를 뒤흔들 가십거리를 찾아 이슈화 시키고, 그들이 깔아 놓은 판 위에서 부화뇌동 춤을 추는 언론이 있을 뿐이다.




지금의 우리처럼 투쟁과도 같았을 그녀들의 불꽃같은 삶. 역모로 참형된 가문이라 하여 세상에 저평가된 문장이 아닌, 그리고 후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현모양처 이미지가 아닌 그녀들의 진짜 삶이 몹시 궁금하다. 조만간 다시 그녀들을 만나러 강릉에 다녀와야겠다.


※ 경북 강원 산불 피해지역의 빠른 복구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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