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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섬 Nov 26. 2022

그림, 죽음을 묵도하다

생의 마침표_조프로이, 캐닝턴 외


삶과 죽음은 같은가, 다른가... 태어났다는 건 언젠가 반드시 죽을 운명이라는 것이다. 죽어야겠다 생각한 적 없지만 그렇다고 죽음에 대해 생각 않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 그래서 사는 것만큼이나 죽음도 중요하다.


생명, 살아있는 것을 그리는 화가들은 죽음 또한 그림으로 남겼다. 그림 속에서 삶과 죽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크나큰 슬픔과 상실, 그리움이 남겨진 이들의 몫이라면, 생의 마침표를 찍는 당사자에게 죽음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삶이 각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듯이 죽음 또한 여러 모습을 하고 있다. 화가들이 그림으로 남긴 죽음들을 조용히 묵도해 본다.


Jean Geoffroy_Visit Day at the Hospital (1889) / Thomas Kennington_Homeless (1890)


죽음을 비껴가는 자,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자 있는가? 산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다. 어린아이도, 노인도, 가난하거나 부귀영화 누린다 해도 죽음을 맞는다. 그 시기나 형태를 달리 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모두는 죽는다.


조프로이의 '병원 방문의 날'과 캐닝턴의 '노숙자'에서는 죽음을 목전에 둔 아이가 창백하게 누워있다. 아비와 어미는 가혹한 삶의 현실에서 다가오는 죽음을 막을 수 없다. 가난한 아비는 오렌지 한 개를 주머니에 담아 왔다. 아이가 평소 좋아하던 것일 테다.


노숙자인 모자에게 있는 것이라곤 작은 보따리가 전부다. 안개비가 내리는 거리에서 병색이 완연한 아이는 쓰러졌다. 이 순간 어미는 아이의 손을 꼭 잡는 것 외에 무얼 할 수 있을까...


헌터의 '어린이 장례식'에서는 아비가 앞장서 작은 관을 들고 뒤에 형제들이 손을 잡고 따르고 있다. 행렬의 끝에는 어미가 있다. 고개를 숙이고 걷는 이 가족의 걸음이 무겁다. 아이의 죽음 앞에서 어미의 심경은 그저 죄인이다.


George Sherwood Hunter_Kinderbegrafenis (1887)


같은 영아의 죽음이지만 야로센코의 '맏이의 장례식'은 너무나 다급하다. 관을 끌어안고 눈길을 달리다시피 종종걸음을 서두르는 부모의 표정도 슬픔보다 초조함이다. 그 이유가 저 뒤편 기울어지는 태양에 있다. 해가 지기 전에 얼어붙은 땅을 파고 단단히 묻어야 한다. 이 추운 겨울, 굶주린 야생동물로부터 아이의 주검을 지키려면 서두르는 방법밖에는 없다. 이미 차가워진 아이지만, 시신 만이라도 지키고픈 마음. 그 지극한 사랑이 슬픔보다 크기에 부모는 눈물을 흘릴 시간이 없다. 아이의 마지막을 지키려 길을 내달린다.

 

Nikolai Yaroshenko_Funeral of Firstborn (1893)


보그다노프 벨스키의 '마지막 유언'에서 노인 주위에 모인 가족은 슬픔에 잠겨 그의 마지막 말을 귀여겨듣는다. 그는 무슨 말을 남기고 있을까? 끝에 서 있는 어린아이는 아직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른들의 조용하고 슬픈 이 의식에 그저 호기심이 가득할 뿐이다.


Nikolay Bogdanov-Belsky_The last will (1893)


Hans Andersen Brendekilde_Udslidt(1889)


불모지에서 돌을 캐내 노동자가 쓰러져 있다. 황량한 들판이 그의 삶을 묘사한다. 흙투성이 낡은 앞치마로 돌을 나르던 그가 쓰러지면서 나막신이 벗겨지고 돌은 쏟아져 흩어졌다. 그의 딸이 달려와 소리치며 도움을 요청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외침에 돌아오는 응답은 없다. 브렌데킬데의 '낡은'이다.


레핀의 그림 '끔찍한 이반과 그의 아들 이반'은 러시아 황제 이반과 그의 아들의 죽음을 그렸다. 잔악한 이반은 다툼 끝에 아들의 머리에 치명상을 입혔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아들을 보고 그제야 정신이 든 이반은 죽어가는 아들을 안고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통회하지만, 때는 늦었고 아들은 죽었다. 세상을 호령하는 황제라 할지라도, 그 계승자라도 죽음 앞에서는 그저 인간이다.


Iliá Repin_Ivan the Terrible and His Son (1885)


José Soriano Fort_“miserable!” (1896)


포트의 작품 '참담함'에서는 병원 336번 침상에서 젊은 여인이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딸과 부모가 임종을 지켰다. 갑작스러운 사고사에 비하면 병사는 오히려 축복인 걸까? 육체는 고통스럽겠지만 죽음을 준비하고 가족과 작별인사를 나눌 수 있으니 말이다. 조부모는 낡고 검소한 복장이지만 손녀에게만은 밝고 환한 드레스를 입히고 머리를 곱게 빗어 땋아주었다. 남겨질 아이를 걱정 말라고, 남 부럽지 않게 잘 보살피겠다 딸에게 약속하는 것처럼...


폭풍에 배가 난파되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구하고자 필사의 노력을 하지만 아들의 몸은 이미 창백하다. 어떻게든 살려내기 위해 숨을 불어넣지만 안타깝게도 기유의 그림 제목은 'Goodbye'다.


Alfred Guillou_ Goodbye! (1892)


Massimo d'Azeglio_A revenge (1835)


조금 다른 모습들의 죽음도 있다. 다첼리오의 위의 그림은 '복수'다. 복수의 그림자를 나타내듯 하늘엔 금방 폭풍우가 내리칠 먹구름이 드리워 있다. 희생된 이가 황량한 산길에 충견과 함께 쓰러져 있고 길 끝 그의 흰 말이 주인을 잃은 채 있다. 살인을 저지른 이들은 저 멀리 산 위로 도망을 다. 복수는 실행의 순간 끝이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로 연결되어 또 다른 복수의 시작이 된다.


마네의 그림에서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이가 침대에 누워 있다. 무슨 이유로 그는 자신에게 사형을 집행했는가... 연미복에 나비넥타이, 구두. 자신의 마지막 예식을 준비하고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Edouard Manet_The Suicide (1877)


아래 그림은 쿠르베의 '오르난스에서의 장례식'이다. 작은 마을, 구름 가득 어둠 깔린 하늘 아래 삼촌의 장례식을 치른다. 3.1×6.6m 크기의 거대한 작품에, 종교적 이야기나 영웅이 아닌 장례식에 참석 한 마을 사람 모두를 담았다. 이것이 바로 과장되거나 꾸며지지 않은 우리네 삶이자 쿠르베의 진수다.  


Gustave Courbet_A Burial At Ornans (1849)


Christian  Nahl_The Dead Miner (1867)


죽음의 묵도는 인간만의 식이 아니다. 날과 랜시어의 작품 '죽은 광부'와 '양치기 개의 애도'를 보면 반려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개들이 등장한다. 원대한 꿈을 안고 황금을 쫓아 미국 땅까지 흘러 온 그에게 가족이란 이 땅에서 만난 떠돌이 개가 전부다. 나침반을 들고 황금이 묻혀있을 곳을 찾아 눈밭을 헤매던 그의 외로운 죽음에 울부짖는 것 또한 그의 개뿐이다.


목동의 관 위에 턱을 괴고 자리를 떠나지 않는, 목동만큼이나 늙은 양치기 개... 바닥의 지팡이와 모자가 그가 남긴 유품 전부다. 아마도 이별의 시간이 길지는 않을 것이다. 양치기 개는 늘 그랬듯이 곧 목동의 뒤를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개에게 그는 이 세상의 전부, 아니 온 우주였다.


Edwin Landseer_The Old Shepherd's Chief Mourner (1837)

 

Frederick William Elwell_The Wedding Dress (1911)


엘웰의 '웨딩드레스'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눈부시게 아름답던 그녀, 행복이 정점을 이루던 그 최고의 순간이 지금 그녀를 더욱 비참하고 슬프게 한다. 빛과 어둠의 대비는 삶과 죽음을 가르고 백색의 웨딩드레스와 검은 상복이 남겨졌다. 그는 죽었고, 그녀는 찬란했던 찰나의 끝을 붙잡고 있다.


Vasily Grigorevich Perov_Last Journey (1865)


페로프의 '마지막 여정'에서는 낡은 썰매 위에 나무 관과 어린 자녀가 자리 잡았다. 그녀는 하루아침에 과부가 되었다. 눈 덮인 길은 고향을 향하고 있을 것이다. 타지에서 남편을 잃은 그녀가 머물 곳은 고향뿐이다.  남편의 관을 싣고 고향으로 향하는 내내 그녀의 고개는 떨궈진 채다.


Nikolay Alekseyevich Kasatkin_Orphaned (1891) /Uroš Predić_Orphan on Mothers Grave (1888)


카사트킨과 프레디치는 부모를 잃은 아이의 절망을 그렸다. 아직 돌봄이 필요한 어린아이가 세상에 버려졌다. 화가는 어떤 마음으로 이 그림을 그렸을까? 단순히 인간의 슬픔이나 아픔을 표현하고자 했다면 굳이 고아를 소재 삼지 않아도 충분했을 것이다. 사회의 관심과 도움을 호소하고자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었을까?


Zygmunt Andrychiewicz_Death of the Artist, The Last Friend (1901)


화가가 화가의 죽음을 그렸다. 안드리치에비츠 '예술가의 죽음, 마지막 친구'에서 젊은 화가는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그림을 그렸다. 이젤과 바닥에 흩어진 그림, 팔레트, 물감 튜브가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위로일까? 마지막 친구, 죽음이 발치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죽음... 나는 아직 죽음의 의미를 잘 모르지만, 화가들이 그린 여러 죽음의 얼굴들을 마주하며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지, 나의 죽음은 어떤 모습일지를 11월의 끝자락에서 생각해 본다.


사진보다 선명한 빛이 쏟아지는 칼스테니우스의 '한여름의 묘지'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유한한 삶, 죽음은 죽은 자에게도 남겨진 이에게도 한여름은 아닐는지...


Gottfrid Samuel Nikolaus Kallstenius_Cemetary in Midsummer (1887)



[Jean Geoffroy] : Christa Zaat

[Thomas Kennington] : Christa Zaat

[George Sherwood Hunter] : Christa Zaat

[Nikolai Yaroshenko] : Christa Zaat

[Nikolay Bogdanov-Belsky] : Una Mirada a los Pintores Nórdicos y del Antiguo Imperio Ruso

[Hans Andersen Brendekilde] : Christa Zaat

[Iliá Repin] : Christa Zaat

[José Soriano Fort] : Museo del Prado 2.0

[Alfred Guillou] : Christa Zaat

[Massimo d'Azeglio] : Un viaje a través de la Historia del Arte

[Edouard Manet] : Inspir_arte

[Gustave Courbet] : Museo del Prado 2.0

[Christian  Nahl] : Christa Zaat

[Edwin Landseer] : Christa Zaat

[Frederick William Elwell] : Christa Zaat

[Vasily Grigorevich Perov] : Una Mirada a los Pintores Nórdicos y del Antiguo Imperio Ruso

[Nikolay Alekseyevich Kasatkin] : Christa Zaat

[Uroš Predić] : Christa Zaat

[Zygmunt Andrychiewicz] : Christa Zaat

[Gottfrid Samuel Nikolaus Kallstenius] : Christa Za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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