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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섬 Sep 03. 2022

그림, 경계의 가장자리에 서다

기다리는 사람들_링


덴마크의 화가 링(Laurits Andersen Ring)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주제는 서로 다른 공간을 구분 짓거나 연결하는 선과 면의 경계와 그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바다, 철로, 다리, 교차로, 출입구(창문)와 같은 물리적인 경계는 그 경계선에 위치한 사람들로 인하여 떠남과 그리움, 삶과 죽음과 같은 관념적인 경계와 만나게 된다.


그의 그림에서 인상적인 건 일반적인 그림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독특한 구도의 인물들이었다. 기다림은 때에 따라 지난하기도 혹은 설레는 기쁨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그의 인물들은 고독에 가깝다. 이 사람들은 대체 무얼 기다리는 걸까? 먼 곳에 고정된 저 시선의 끝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화가는 기다림을 통해 어떤 시간을 말하고 싶었던 걸?


기다리는 동안에는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것은 할 수 없다. 온통 마음에 기다림만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한 때 기약 없는 기다림이 있었다. 생사조차 알 수 없던 그 시간. 기다리란 말도, 기다리지 말란 말도 없이 훌쩍 떠나버린 이를 향한 그리움은 점점 커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바란 건 제발 살아만 있어다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무얼 하든 다 괜찮으니 그저 살아만 있으라 빌고 또 빌고, 세상 모든 것에 빌 뿐이었던 형벌과도 같은 시간...


혹시 지금, 경계의 끝에 서 있나요?
당신의 기다림은
설렘인가요? 지난한 고독인가요?


소녀가 작은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다. 아래서 위로 하는 사선의 앵글에서 타이트하게 클로즈업된 얼굴은 그림이라기보다 영상 속에서 볼 법한 독특한 시선이다. 당시 링은 그림에서처럼 조그만 다락방에서 거주했다고 한다.


L. A. Ring_Girl Looking out of a Skylight (1885)


떠나는 기차가 아니다. 기차의 방향은 역을 향한다. 하지만 기차를 맞이하는 역무원의 뒷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다. 그는 돌아올 수 없는, 돌아오지 않을 이를 떠올리고 있는 걸까? 기차에 타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늘 그 시간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는 마음을 그린 것은 아닐까.


L. A. Ring_The Lineman (1884)


반쯤 열린 문으로 소년은 밖을 본다. 평범한 소년이라면 밖을 보는 것보다 당장 뛰어나가는 모습이 더 어울릴 것이다. 링의 그림 전체에 흐르고 있는 분위기 때문인지, 이 그림에서 나는 초등학교 동창이 떠올랐다. 그 아이는 혈우병을 앓고 있어서 넘어지는 것조차 위험했기에, 늘 체육시간에 운동장에 나가지 못하고 홀로 교실에 남아 창 밖 친구들을 저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깊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다 눈빛이 마주칠 때면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던 그 아이.


L. A. Ring_Portrait of a Peasant Boy by an Open Half Door (1885)


이 여인은 매일 이 해변을 걷는 듯하다. 바람 부는 바닷가는, 산책이 처음인 이에게 낭만보다 당황함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따가운 볕을 가려 줄 모자는 거센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머리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고, 추위에 떨지 않게 따듯한 옷을 입은 모습은 바다 산책이 그녀에게 익숙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먼바다를 오랫동안 바라보는 여인의 마음속엔 어떤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들고 밀려나가는 것일까?


L. A. Ring_Sigrid Stands with Straw Hat on the Beach at Karrebæksminde (1897)


쉽사리 잠들지 못하는 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 밖처럼 그는 하나 둘 억을 지워가는 혼자만의 의식을 치르고 있는지 모른다. 노인에게 시간이란 어떤 의미일까? 하는 일의 양과 폭이 줄어 표면적인 시간은 많아졌지만, 그에게 남아있는 시간의 총량은 점점 줄어만 간다.


L. A. Ring_Alone. Interior by Lamplight with a Seated Man Buried in Thought (1899)


눈이 그치기를 기다린다. 평생 고향을 지키며 살아온 그는 오랜 경험으로 눈이 곧 그칠 것이라는 것을 안다. 익숙해져 예측 가능한 날씨처럼, 마음의 날씨도 익숙해져 예측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L. A. Ring_Bad weather (1908)


뺨이 얼어붙을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난간에 서 있는 마음, 기찻길 교차로에서 자전거에 기대 서 있는 마음, 비가 그쳤나? 우산을 들고 문 밖을 내다보는 마음, 창밖을 하염없이 응시하는 마음들은 각기 다른 시간을 품고 있는 기다림의 형상이다. 시그리드는 그의 아내이고, 올레는 아들이다.


L. A. Ring_Mrs Sigrid Ring Standing at a Stone Balustrade (1912)


L. A. Ring_Waiting for the Train (1914)


L. A. Ring_Has it Stopped Raining? (1922)


L. A. Ring_Ole Ring looks over Roskilde (1925)


L. A. Ring_The spring and the old man (1926)


L. A. Ring_The Young Woman and the Autumn (1927)


L. A. Ring_Ole Looking out of the Window (1930)


L. A. Ring_In the Churchyard in Fløng, Seeland (1904)


무덤가에 앉아 있는 노파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단지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염없는 시간을 견디면 곧 무덤의 주인을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그림 출처 : PAINTERS FROM THE NO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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