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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Jul 24. 2019

오랫동안 미워했던 나의 허벅지에게

위험에서 내 생명을 구하는 건 바로 너일 거야! 

위험한 상황에서 내 생명을 구하는 건 너일 거야. 

너를 보는 시선이 달라져서 기뻐. 처음으로 너를 알아챈 건 달리다 숨이 벅차오르고 멈추고 싶어서 시선을 떨어뜨린 순간. 머리는 멈추려는 생각으로 가득한데 너는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더라. 땅을 박차고 근육을 쓰면서. 


그때 알아차렸어. 꾸준히 달리기 위해서는 비싼 기능성 운동복이나 강한 정신력보다 네가 중요하구나. 알아, 너를 오래 미워했지. 언젠가 가늘어져야할 고민거리였어. 거울 앞에서 허벅지살을 끌어당기며 ‘이정도만 돼도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이 셀 수 없이 많아. 레깅스나 수영복, 짧은 바지가 사고 싶다가도 널 떠올리면 소비 욕구가 가라앉았지. 


하지만 지금, 탄탄하게 레깅스를 받치는 모습이 얼마나 멋진지! 3분만 달려도 헐떡이다 30분을 달리게 된 건 네 덕이야. 종아리만 쓸 때와 허벅지에 힘을 줘 나아가는 건 차원이 달라. 네 힘이면 바람을 가르고 나아갈 수 있지. 처음부터 끝까지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도 네 몫. 


빈약한 허리 근육과 무릎의 충격을 받아주고 높은 강도의 근력 운동도 버텨. 특히 위기 상황에 강해. 위험한 상황에서 내 생명을 구하는 건 너일 거야. 머리보다 빠르게 위험을 파악하겠지. 아무리 출근시간이 촉박해도 열차 ‘접근’ 신호에는 거뜬히 타고, 핸드폰에 한눈을 팔다 갑자기 들이닥친 차를 잽싸게 피했지. 


네 크기에만 집중했어. 근육을 버티기 위한 부드러운 지방을 외면하고 근육까지 줄이려 했어. 무리한 다이어트로 하루에 두유 네 팩 마시고 세 시간 운동할 때도 종아리에 알이 잡히니 '종아리는 신의 영역이구나.' 절망했어. 그림자에 비치는 모습이 진짜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다리를 보며 부러워했지.


한 손바닥에 잡히지 않는 만큼 자르고 싶었어. 지방 흡입이나 분해 주사를 맞아 없애고 싶었어. 잔인한 영화는 한 씬도 못 보면서 널 도려내려는 상상에는 거침이 없었지. 왜 몰랐을까. '다리'를 수식하는 단어는 '매끈한'이 아니라 '튼튼한'이라는 걸. 튼튼한 다리를 보며 '튼실하다'고 비하하고 부으면 더 싫었어. 널 가리려고 옥죄는 스타킹이나 바지를 입느라 어쩔 수 없었는데. ‘하늘 발차기’, ‘걸그룹 00 다리 운동’, ‘하체 지방 부수기’라는 유투브 운동 영상에서 나오는 '지방이 타오르는 걸 느끼세요!'라는 말에 너를 없애고 싶은 충동이 얼마나 강했는지. 


이제는 땅을 박찰 때 솟아오르는 근육을 느껴. 단단해져 나를 버티겠지. 오래 지탱해줘. 네 힘으로 망아지처럼 뛰놀던 유년 시절과 종일 책상에서 버티던 청소년기를 지나 여기까지 왔어. 넌 내가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고 얻게 하는 근원이야. 


이제야 네가 보여. 널 미워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썼어. 널 미워하며 얼마나 작아졌는지. 너를 미워하는 건 나를 미워하는 거였어. 이제 그만 나는 너를, 나를 사랑하려고 해. 


용서해줄래?




by 하람
꾸준히 글을 쓰고 싶습니다 


소글매거진

소글워크숍에서 초고를 쓴 뒤 발전시켜 완성한 원고를 싣고 있습니다. 


여성전용 글쓰기 클래스 '소글워크숍' 카카오플러스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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