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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Jul 26. 2019

여전히 '형님'의 이름을 모른다

 차례상을 차릴 때 이름은 없어도 되었으니까 

나의 '형님'. 훤칠한 키에 온화한 목소리, 언제나 서글서글 웃는 인상의 그녀. 만나온 지 1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 관계가 나빴던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이름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겠지. 딱히 이름을 부를 일이 없었으므로 기억할 일도 없었을 뿐이다.

 

우리는 '가족'이지만, 일 년에 두 번만 만나는 사이다. “오느라 고생했지? 뭐 타고 왔어?” 만날 때마다 그녀는 높은 톤으로 나를 환대하였으나, 매번 우리는 서로에 묻고 답할 새도 없이 바로 업무에 투입됐다. 그리고는 한 차례의 연습 없이도 팀웍을 발휘하여 임무를 해냈다. 그녀는 연장자이자 선임이자 팀장. 나의 멘토이자 내가 매달릴 유일한 끈이었지만 그 임무가 끝나면 우리 사이도 끝이다. 평가도 없고, 후기도 없고, 회식도 없다. 




일 년에 두 번만 만나는 우리의 임무. 명절 차례상을 차리고 차례상을 물린 뒤, '온 가족'이라는 이들의 밥상을 차린다. 그들이 먹고 난 그릇을 닦는 일까지가 끝이다. 

그녀는 나에게 굳이 따지자면 종시동서쯤 되었다. 혹은 시종동서? 아니면 그냥 종동서? 정확한 호칭은 모르겠다. 남편 사촌형의 아내 되는 사람. 내가 부르기로는 그냥 형님. 아마 그녀가 없었다면 명절이 훨씬 더 끔찍했을 것이다. 물론 그녀가 있다고 명절이 끔찍하지 않은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결혼 후 명절을 지내면서 어른들이 아무리 며느리들을 위한답시고 해도 며느리들의 위치는 가장 낮은 곳에 있었다. 



어느 해 명절. 큰아버님이 며느리들을 불러 차례가 다 끝난 차례상에 절을 하게 시켰다. 그리고는 술을 한잔 씩 받게 했다. 우리는 쭈뼛쭈뼛 들어가서 절을 했다. 그녀가 먼저 술잔을 받았다. 

 “이 집안에 시집 와서 아들 하나 못 낳아서 조상님들 뵐 면목이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형님은 조금 웃고 있었다. 어른들은 화들짝 놀라며 “네가 딸들 이쁘게 나아서 얼마나 잘 키우는지 아는데 그런 말할 것 없다.”고 대답했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차례 끝에 며느리들에게 절을 시키고 민망한 말을 하게 하는 일은 없었다.  


그곳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었고 그 일을 감정을 배제한 채 주어진 임무로 처리하는 선임자가 있었기에 그 시간을 버텨올 수 있었다. 내가 그녀를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임무를 그저 비즈니스처럼 처리하였기 때문이다. 나를 신뢰하고 배려했다.


명절을 깨부수고 그 족쇄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크다. 하지만 그러진 않았다. 언제나 거기엔 그녀와 같은 이들이 있었다. 엄마와 언니들, 할머니들, 시모와 시백모들, 동서들. 남편 집안의 조상을 모시는 행사를 무사히 잘 치르는 것이 자손을 위하는 일이고 집안이 화목해지는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 그 임무를 해내는 것이 자신의 업이라고 믿는 사람들, 그냥 착하고 선하게 살지만 스스로를 당연한 듯 희생하고 만만한 다른 여성들의 희생마저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라면 이왕이면 즐겁게 하자는 사람들. 그들이 가부장제의 부역자일지도 모른다. 피해자일 수도 있지만. 다만 나는 그렇게 외치고 싶은 것이다. 

“기둥 뒤에 공간 있어요.” 그러니까 거기에도 사람이 있고 서로를 위로하고 의지하며 힘이 되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협력해서 명절 차례와 제사를 없앨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협력할 수 있는 때는 차례상을 차리고 치울 때 뿐이고, 그 외에는 만날 일도 없으니까. 이름도 모르고 연락처도 없다. 혹시 만날 일이 있고 연락처를 알게 된다고 해도 우리가 길러져 온 문화가, 그 사고방식이 그렇게 급진적으로 나서지 못하게 막을 것이다. 나 역시 변화를 스스로 쟁취하는 변혁가가 아니며 늘 불만을 투덜대기만 하는 투덜이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저 그녀와 뒤풀이나 한번 했으면 좋겠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 하면서 그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생각을 했는지 물어보고 싶다. 그 어른들이 이제 제사를 그만하겠다고 선언할 만한 그런 강력한 대답은 없을지 그런 수다나 떨어보고 싶다.



by 도머구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요. 

이미 '결혼'을 해 버린 우리들, 힘냅시다. 

비혼을 선택한 당신들을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소글매거진

소글워크숍 중에 초고를 쓴 뒤 발전시켜 완성한, 수강생들의 원고를 싣고 있습니다. 


여성전용 글쓰기 클래스 '소글워크숍' 카카오플러스친구 

http://pf.kakao.com/_xaMK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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