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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Jul 31. 2019

야망의 뒷맛은 달콤쌉싸름  

에그타르트와 쩐주나이차는 내가 들여왔어야 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있던 바로 그해에 나는 중국으로 유학되었다. 지긋지긋하던 세계를 떠나 이상적이었던 세계에 발을 디뎠을 때, 처음엔 모든 게 새로웠다. 차이나드림이 가능한 곳에 와 있다고 생각했다. 이모의 일 때문에 이모네 식구들은 중국에 가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모든 친척이 이모를 축하할 겸 중국으로 갔는데 우리 가족 중엔 나만 끼어 있었다. 며칠 후 모두가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나만은 그러지 못했다. 우리 집과 달리 단란하고 화목하고 가족적인, 그래서 늘 부러워하던 이모네 가족이 되었는데 왜 난 기쁘지 않았을까. 이모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했지만, 난 자주 한국의 엄마를 생각했다. 어렸지 뭐야. 


기온이 40도를 넘어가면 학교도 일도 모두 정지되는 그곳. 언제나 39도였다. 더위를 많이 타는 나는 흘리는 땀만큼 고독해졌다. 외로움의 주변에도 한 두 개 위로가 있다고 했던가. 당시 살던 아파트 단지 안 쩐주나이차와 에그타르트가 나에겐 그랬다. 


그것들은 상한가를 향해 가는 주식처럼 깜빡거리며 나를 홀렸다. 어학원까지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매일 샀다. 간식이 아니라 주식이었다. 그 맛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이모였을 것이다.이모는 내게 새로운 것들을 많이 보여주고 싶어 했다. 


흙탕물 속 까만 개구리알. 쩐주나이차에 첫 인상은 그랬다. 저게 과연 맛이 있을까? 까맣고 동글동글 알들은 뭐로 만들어진 걸까. 중국산 고무 아니야? 짧은 시간 안에 없던 환 공포증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넓은 빨대 안으로 향긋한 단내를 뿜어내는 나이차와 함께 까만 타피오카 펄들이 줄을 지어 훅하고 내 목구멍 안으로 넘어갔다. 처음엔 펄을 씹지도 않고 삼켰는데 목 안으로 후루룩 넘어가는 느낌이 좋았다. 그러다 이 까만 개구리알들이 내 위에서 올챙이가 될까 봐 걱정이 됐다. 


알을 다 터뜨려야겠다는 심정으로 입에 머금고 씹었을 때의 그 감촉이란 과연 충격적이었다. 젤리보다 훨씬 말랑하고 부드러웠다. 쫄깃하기는 또 얼마나 쫄깃한지 씹고 또 씹다 보면 어금니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나이차와 함께 먹을 때에는 몰랐는데 펄만 따로 먹으니 놀랍게도 맛이 없을 무(無)였다. 다 마신 컵 속에 몇 개 남지 않은 알갱이들을 어떻게든 먹으려 빨대를 여기저기 돌려가며 쪽쪽 빨아 먹었다. 어쩐지 단 한 알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후론 매일 쩐주나이차를 마시며 생각했다. ‘이 아이템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가야겠어. 분명 대박이 날거야'. 아마 내가 돈이 아주 많았거나 조금 더 용기가 있어서 ’여기 사장 나오라 그래. 나랑 사업하자고 그래!’라고 밀어붙였더라면 지금 공차의 CEO는 나였을지도. 그렇게 사업 구상까지 할 정도로 어리지 않던 나는 나이차가 밀크티인지도 몰랐고 밀크티가 홍차로 만들어진 것도 몰랐다. 홍차 안에 카페인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래서 매일 마셨고 매일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에그타르트는 쩐주나이차보다 가까웠다. 어학원까에 가는 버스정류장 앞에 가게가 있었다. 에그타르트를 굽는 냄새가 학원에 가는 나를 정류장 앞에서 배웅했고 돌아올 땐 마중 나왔다. 에그타르트를 파는 곳은 빵집이라 여러 가지 빵을 팔았는데, 고기가 들어간 빵을 먹고는 제대로 된 중국을 경험했다. 부정적 의미로.두 번 다시는 그곳에서 에그타르트 외에는 먹지 않았다. 


에그타르트는 그 당시 우리나라 돈으로 300원이었다. 페이스트리로 된 마카오식 에그타르트가 아닌 겉이 딱딱한 쿠키로 된 홍콩식 에그타르트. 갓 구워져 나와 은색 껍질에 차분하게 앉아 노란빛을 띠며 내 앞에 있던 에그타르트는 매혹적이었다. 향기로 한번, 푸딩처럼 부드러운 모양으로 유혹하는데, 나는 매번 쉽게 넘어가버렸다. 날 살찌우려던 속셈을 뻔히 알고도 당연히 넘어갔다. 


따끈따끈한 에그타르트의 파이 부분은 절대 바스러지지 않을 것 같이 견고했다. 위에 달걀 부분은 노오란 개나리색을 하고 있었고 어디 하나 그을린 곳 없이 만질만질했다. 한 입 베어 물면 달지 않은 파이 부분은 혀에 부들부들한 달걀 부분이 이빨에 닿으며 바삭한 소리를 냈다. 나의 잇자국을 보여주며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유지했다. 커스터드 크림은 푸딩보다 탱탱했지만 혀에 닿자마자 부드럽게 녹아버렸다. 아주 가끔 달걀의 비린 맛이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달콤한 맛이 주는 위로가 더 컸다. 


버스가 코너를 돌 때, 타르트를 우물우물거리고 있으면 멀미와 함께 풍미가 더해지는 기분이랄까. ‘안 되겠다. 얘도 한국 돌아갈 때 데려가야지. 카페를 차려서 메인 음료로 쩐주나이차를 팔고 디저트로 에그타르트도 구워 팔아야겠어.’ 어린 나는 꽤 야망이 컸다.  


돌이켜보니, 나에게 쩐주나이차와 에그타르트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상(理想)이었다. 그러나 달콤했던 세계는 잠시뿐이었고, 나는 6개월 만에 현실로 돌아왔다. 그냥 돌아와 버렸다. 많은 사람들의 잠시의 일탈이 그렇듯이. 한국에 돌아와서도 쩐주나이차와 에그타르트를 추억했다. 중국에서의 생활은 아주 짧았고 강렬했다. 달고 부드러웠던, 그리고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저 두 음식의 매혹처럼. 그리고 그 기억은 깊은 후유증을 남겼다. 자그마치 10년이나. 


그사이 내가 데려오려던 아이들은 공차와 KFC에서 먼저 들여왔다. 그 소식을 접했을 때 왠지 모를 배신감과 후회가 밀려왔다. 아마도 내가 거머쥐지 못한 야망이 떠올라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원래 내가 먼저였는데. 나만 알던 거였는데…로 시작해 조금 더 버텨볼걸. 조금 더 멀리 바라볼 걸. 이렇게 오랜 시간을 지금의 세상에서 갇혀 살게 될 줄은 몰랐는데…로 끝이 난다. 빨대 안에서 턱하고 막혀버린 타피오카가 된 기분. 카페인에 익숙해져 버린 어른이 되었지만, 가끔 너무 독한 커피를 마시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처럼. 여전히 달콤씁쓸하다. 나의 어렸던 야망은 여전히 맛으로 기억된다. 




by 이유진 

저와 주변사람들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씁니다.(그래서 누가 볼까 살짝 겁나지만요)


소글매거진

소글워크숍 중에 초고를 쓴 뒤 발전시켜 완성한, 수강생들의 원고를 싣고 있습니다. 

여성전용 글쓰기 클래스 '소글워크숍' 카카오플러스친구 

http://pf.kakao.com/_xaMK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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