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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카우와 팔복기사식당

서울일기/2019 09 18 수 14:57

by 소은성

1 길을 걸을 때는 흥이 스몄던 글감이 책상에 각 잡고 앉으니 사라지네. 역시 스마트폰으로 직접 쓰거나, 휴대용키보드 산 거 들고 다녀야지.


2 ....생각하다가 1시간 전에 마을버스에 도시락 두고 내린 것 생각났다. 다시는 길이나 버스에서 뭔가 집중해서 쓰지 않겠다고 다짐해놓고, 또 다른 다짐을 했다. 그렇다. 나란 인간은 매분 매초 쓰잘데기 없는 다짐을 하다가 유기농 재료로 만든 도시락과 장 본 것을 홀랑 두고 내려버리는 것이다.


3 운동칭찬방 친구들이 귀엽고 고맙다. 파워 요가 후 탈탈 털려서 (+스마트폰에 뭐 쓰다 잊어버리긴 했지만 탈탈 털린 정신상태가 한 몫을 하였다) 도시락 +장 본 것 두고 내렸다고 했더니 다들 찾을 수 있다! 찾을 수 있다!며 격려해 주었다. '포기하겠읍니다....장 본 것은 고작 천원 상당의 깻잎 두 봉입니다' 고백하니


"캐비어 같은 게 아니라 다행입니다!"

"그래도 정성들인 도시락은 아깝습니다!"

"도시락 아깝습니다"

외쳐주셔서.....


실은 도시락이라 함은......냉동 가자미 필렛 구운 것과 새송이버섯 구운 걸 섞어 담았더니....생선살이 모두 버섯에 묻어, 독일 사는 유기농맨이나 좋다고 먹거나, 아니면 거버 이유식 다음 단계의 이유식 레벨 2 정도 되는 이상한 음식이란 것은 고백하지 못했다.


참. 도시락에 밥도 까먹어서 안 가지고 왔다는 것도 고백하지 못했다.


4 슬픔을 잊으려 작업실 근처 '팔복 기사식당'에서 돌솥비빔밥을 먹었다. 연희동과 남가좌동 사이의 이 곳은 15년을 끈 재개발이 2년 뒤 이루어지려는 곳(아래 8번의 동네 아주머니 피셜)인데, 그 덕인지 백반값이 6천원 선이다.


돌비도 6천원인데, 세상에 반찬으로 단무지나 중국산 김치가 아닌, 진짜 김치와 진짜 진미채무침과 무려 머윗잎 무침이 나오는 게 아닌가! 돌비도 맛있었다. 당근도 잘게 채 썰고 진미채 무침도 짧게 잘라주는 것에서 어쩐지 아기가 된 느낌이 들었다. (이유가 너무 궁금하다...)


아무래도 현금을 드려야 되는 것인데...싶어 오만원도 되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셨다. 되게 마음 편하게 해주시는 미소였다. 나는 그런 것에 되게 예민하다. 소심해서 그렇다. "사장님! 스마트폰을 맡기고 얼른 가서 오만원 짜리를 가져오겠습니다!" 외치니 아주머니가 충청도적인 느린 말투로 "그냥 다녀와도 돼유" 해주셨다. 그래도 뛰어갔다. 아주머니의 마음에 성의를 보이기 위하여.


씁쓰래하고 맛난 나물 이름을 물으니 머운닙이라고 하셨다. 동네 다 팔아요. 씁쓰래하죠? 여기저기 다 팔아요.


나는 또 옛날에 팔도 전통시장 취재하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너무 너무 너무 맛나요 (그 정도는 아니어따)

집에서 무쳐 보려구여 (사다두면 바티가 무치게찌)

라고 너스레를 떨구 말아따.


다음에 가서 꽃게찌개 시켜봐야지. 옆자리 사람들이 진짜 맛나지 하면서 밥을 더 푸러가는 걸 봤다.

마따. 여기는 밥도 더 먹으라고 밥통 오픈해 두셨다.


5 강의할 때 가져가려고 새콤달콤 말랑카우 에이비씨 초콜렛을 동네 수퍼에서 샀다. 고향에서 쌀도 복숭아도 감자도 가져다 파는 정말 소박한 수퍼라서, 종류가 이런데. 사실 이런 거 되게 맛있지 않나요?


6 그렇다. 나는 토즈 같은 데 강의하러 가면서 캬라멜과 바구니를 챙기는 선생이다. 글을 쓸 때 가장 주요한 것은 영감이나 천재성이 아니라, 달다구리이다. +커피.


7 부르스타와 모카포트와 에티오피아 원두가루를 가져가서 달여 맥이고 싶지만 (왜 나는 우리 수강생을 아기새들처럼 여기는 걸까. 나쁜 버릇이다. 애가 없어서 그럴까) 기인이 되기는 싫어서, 꾹 참아.


8 이 동네 약국을 보라. 아그리빠와 쥘리앵이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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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국 앞에서 이야기하시던 아주머니 두 분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원래 아주머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말 거는 걸 되게 좋아한다. 온동네가 살롱이지, 뭐.


암튼 그건 그렇고.


약국 주인이 90까지 장수 운영 하시다, 재개발을 앞두고 그만 한 것이 아니라, 나이가 너무 많아 문을 닫은 것이라고 한다. 아 그렇구나. 재개발 때문이 아니구나. 아주머니 두 분은 그것이 참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15년이면 징글징글하셨겠네요. 기다리리가.

그치. 그래서 (얼굴을 가리키며) 찌그러졌잖아. 오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

오래 걸린대요?

이년안에 된대. 이년안엔 꼭 될 거야.


희망을 버리지 않으시는 듯 했다.


약국은 모래내로 가.

내 등에 대고 또 알려주시길래

아프면 안 되겠네요. 안 아프면 되죠.

오호호호호호.


또 봬요!



9 작업실 앞에 1시간째 앉아계시는 할매.

어떻게 눈썹이 보라색이에요? 레이디 가가인 줄. 게다가 1밀리미터 정도로 얇다.

연희동은 너무 전위적이다.

서울이 뉴욕이라면 연희동(부자동네 연희동 말고, 연희동의 끄트머리에 이런 곳이 있다)는 윌리엄스버그?

암튼 그런 생각을 하는데

집앞에 쓰레기 버리지 말어? 그러셔서

안 버려요. 저희는 안 버려요.

버리지 마. 자꾸 누가 버려.

저희 아니에요. 저희는 꼭 지켜요.


밥 먹고 돌아오니 2시간째 앉아 계신다.

3층이 이사가는데, 곧 가져가려고 내놓은 항아리 장독*10개는 되는 듯* 을 지키고 계시고 있다.

딸기 말랑카우 3개를 드렸다. 하나 드리려다 정없어서 두개 드리려다 말랑카우는 두개부터 시작이지 싶어 세 개.

아니, 가가 할머니가 엄청 활짝 웃으시는 게 아닌가.

아까는 무섭게 그래놓고.


역시, 남녀노소. 단 것이 최고다.


10 엊그제 만두 먹다가 바티랑 한참 이야기했는데,


프랑스 가면 우리가 마을 티타임 열자고.

프랑스 소도시에서는 길에 차가 없는 데가 많아서 길에 큰 탁자 펴고 와인도 마시고 케이크도 먹고 한다네, 동네 사람들끼리 맘이 맞으면 모이고 아닌 동네는 아니라구.


나는 그런걸 좋아하는 인간이 되어버려서,

혹시 내가 살게 될 동네가 차가우면 어쩌지, 나는 동양인라구 꼽주면 어쩌지,

고민하다가


야 그러면 우리가 부르지. 싫은 사람은 안 오면 되구. 애호박 부침개 부치면 다들 사랑에 빠질 걸!


했다.



11

역시 나는 어슬렁 일기가 체질인가 보다. 너무 신나네 일기 쓰기.

뭐하자고 글쓰기 책 같은 걸 쓰고 있는 걸까. 내 직업상 써야 하긴 하는데, 맞지....


누군가에겐 도움이 되겠지. 그러리라 믿자. 오늘도 가이드북(글쓰기 책의 한 10배는 고되지 않을까)을 쓰는 친구들을 떠올리며 힘을 내본다. 세상에는 나를 위한 글과 남을 위한 글이 있는 거죠, 뭐.


헉. 40분이 지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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