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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May 15. 2018

사물에세이

EP1 하얀 텀블러와 까만 졸음

한손엔 언제나 텀블러가 있다. 후배들은 그녀를 ‘텀블러 언니’라고 부른다. 스타벅스 로고가 새겨진 하얀 텀블러. 안에는 찰랑이는 까만 아메리카노.


졸음을 걱정하는 걸까. 어디에서건 절대로, 절대로 졸고 싶지 않은 걸까. 무엇인가를 한손에 쥐고 걷지 않으면 걸음이 불안한 걸까. 작은 신의 가호처럼 그녀는 늘 매끈하고 갸름한 그것을 오른손에 쥐고 다닌다. 타고난 방향치이므로 나침반처럼 손위에 올려둘 것을 바랬던 건지도 모르겠다. 캠퍼스에 놀러온 관광객이 길을 물을 때마다 "저, 이 학교 학생 아닌데요"라고 정색하는 사람.  누가 길을 물을 때마다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사람.


텀블러안의 커피는 그다지 소용이 없다. 4년 내내 잠을 아주 많이 자고 있다. 길에서 졸음이 오는 일은 드물다. 사실, 졸린 건지 졸리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그녀는 수업 시간 중, 유령처럼 스르르 걸어나와 암막커튼이 드리운 수면실로 향한다. 또래의 여자들이 안마의자 같은 것에 길게 누워 잠든 곳. 그 새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천장을 향해 눈을 껌뻑인다.


수면실에 누우면 잠은 달아나 버린다. 그녀는 고요한 곳이 오싹하다. 혼자 있고 싶지만 적막은 두렵다. 강남이나 인사동처럼 북적거리는 곳을 애써 골라 이어폰을 끼고 걷는다. 한손에 텀블러를 든 채.


어떤 것에도 몰입하지 못하던 그때의 나와 까만 카페인. ‘모순’이라는 글자가 도드라진 나의 텀블러.


앞으로 걷다 뒤로 걷다 하면서 20년이 흘렀다. 여전히 졸음이 많다. 바지락을 씻다가도 마늘껍질을 까다가도 하암, 하품이 난다. 파스타를 먹는 것은 즐겁지만 식물과 동물에서 먹지 못할 부분을 떨어내는 일은 지루하다. 좋아하는 게 있으면 공처럼 튀어오르고 그런 게 없으면 눈이 감긴다.

“왜 졸리지?” 그녀가 왜 졸리지, 라고 말할 때마다 곁에서 링귀니를 삶던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어제도 ‘왜 졸리지?’라고 이야기했어요. 왜냐하면 너는 매일 매일 왜 졸리기 때문에.”


와하하. 수돗물을 튀기며 웃는다. 잠은 잠시 달아나버린다.



사물에 깃든 기억을 통해, 지난 시간을 기록해 보려고 합니다. by 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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