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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May 15. 2018

사물에세이

EP2. 칫솔과 두려움

아침이다. 밥도 먹고 옷도 입었지만 아직 나서지 못한다. 마루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소녀는 학교 화장실이 두렵다. 더럽고 음습하다. 괴물이 끌어당길 것 같다. 어두운 이미지와 연결지어 학교까지 미워하고 싶지 않은데, 그러려면 등교 전에 화장실에서 충분히 시간을 보내야 한다. 4교시를 마치기 전까지 절대로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지 않도록. 효과적인 약이 있었다면 사서 먹었을 테지만 그런 건 없었다.      


가방을 메고 대문을 나간 후 다시 돌아와 화장실에 들른 적도 여러 번. 엄마는 소녀의 이상한 버릇을 슬퍼하는 것 같다. “똑똑한 애가 왜 이러지?” 혼잣말을 한다. 내 딸이 아무 문제도 없이 무난하면 좋겠는데 걸음이 너무 늦거나 학교 화장실에 가지 못하는 게 곤란한 것 같다. 소녀는 왠지 “엄마, 학교 화장실은 너무 더러워요”라고 밀하지 못한다.      


대체 왜 학교에 가지 못하지? 집에 뭘 두고 온 것 같아서일까. 화장실은 그저 핑계였을까. 어린 내가 없으면 이 집이 오즈의 마법사 속 집처럼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아니면 엄마가 도망갈 것 같아서 자꾸만 다시 확인하고 싶었나? 잘 모른다. 아무튼 자신 때문에 엄마가 곤란한 감정을 느끼는 건 불편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이것은 불편하다’ ‘저것은 더럽다’ 또는 그 이것과 저것에 대해 ‘싫다’라고 말하는 것을 소녀는 하지 못한다. 자신의 감정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면 문제가 생기니까. 그래서 소녀는 반복해서 말한다. 괜찮아요. 엄마, 나는 괜찮아요. 괜찮아요. 다 괜찮아요.      


안다. 화장실이 ‘싫다’고 말하면 엄마는 소녀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소녀는 엄마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가 않다. 그녀에겐 소녀 말고도 매일 매일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엄마의 일기장에는 '나 하나 사라져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겠지. 일꾼 하나 사라진 것 같겠지'라고 써 있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할 순 없지만 갑자기 온 세상의 전등이 꺼진 느낌이 든다. 그래서는 안 된다. 소녀는 두려워서 다시는 엄마의 일기장을 훔쳐보지 않는다.


소녀는 거짓말을 선택한다.  나는 무엇이든 다 괜찮다고 말한다.


어느날 담임교사는 소녀의 엄마를 불러 조언한다. “애가 지나치게 어른스러워요. 성장 발달에 좋지 않습니다.” 소녀의 엄마는 부엌 식탁 형광불 아래에서 울면서 묻는다. “너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거니.” 대체 왜 너까지 나를 불행하게 만드냐고 울부짖는 것 같다. 소녀는 엄마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계속해서 “엄마 미안해요. 미안해요”라고 말한다.      


괜찮다는 말 대신 ‘싫다’고 처음 말한 건 열한 살 때다. 소녀는 어느 밤 칫솔을 손에 쥐고 소리를 지른다. “나는 양치질 하기 싫어!” 칫솔을 뺏길까봐 손아귀에 힘을 준다. 싫어, 하기 싫어, 그냥 하기 싫어, 절대로 안 할 거야. 엄마는 구석으로 몰며 매를 때린다. 얘가 미쳤어, 이유가 없잖아, 왜 하기 싫어. 엄마는 이성을 잃는다.      


현관문 밖으로 쫓겨나면서 계속 악을 쓴다.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 싫어, 절대로 안 할 거야. 눈앞에 굳게 닫힌 회색 철문. 난생 처음 “집에서 쫒겨나고 싶지 않다”는 감정을 안다. 다시는 ‘싫다’는 말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사물에 깃든 기억을 통해, 지난 시간을 기록해 보려고 합니다. by 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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