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은성 Aug 05. 2021

다른데 똑같이 일하면 안 된다

보부상적 운명-1

티에리는 쿨하다. 쿨함은 단촐함에서 온다. 그의 책상 위에는 잡스러움이 없다. 은색 맥북과 은색 마우스, 무지 노트 한 권, 만년필이 전부다. 휴식을 위해서는 카페인과 니코틴을 아주 개운한 방식으로 사용한다. 집에서 마련해 온 퀴노아 샐러드 도시락을 먹은 뒤엔 에스트레소 한 잔을 마신다. (관찰 결과, 두번째 잔은 절대로 없었다) 


오후 2시쯤에는 담배를 한 개 말아들고 산책을 나간다. 멋쟁이들은 자신만의 시그니처 아이템이 있다고, 왕년에 지큐 매거진에서 읽었다. 그의 시그니처는 롤링머신이다. 담배 잎을 종이 필터에 쉽고 예쁘게 말도록 돕는 조그만 기계인데 아주 빈티지하다.


그는 나의 공유오피스 동료다. 

그의 롤링머신은 이런 시뻘겅색이 아니다. 안쪽까지, 완벽하게 빈티지한 컬러의 금속이다. 대체 어디에서 샀으려나.



내 친구 샬리는 늘 혓바닥의 침으로 종이필터를 붙이던데, 티에리는 다르다. 컵에 든 물을 사용한다. 혀를 날름거리지 않는다. 역시 멋지다. 



언젠가 그에게 하고 싶은 질문은 두 가지다. 


하나는 길다.

 "프리랜서가 어떻게! 페이셜 미스트도, 아로마 오일도, 어깨 고정 밴드도, 틈틈이 정신을 차리기 위해 줄 그으며 읽을 종이책도, 발을 쉬게 할 실내용 슬리퍼도, 5구 충전기도, 그날의 신체 모드에 따라 달리 사용할 이어폰과 헤드폰도 없이! 온종일! 일에 집중할 수가 있나요, 티에리?" 


다른 하나는 짧다. 

"그 납작한 블랙 가죽 백팩은 대체 어디서 샀어요?" 


그의 백팩은 질감도 컬러도 너무 멋지다. 물론 나에게 리얼 레더는 구매 고려 대상조차 아니다. 보부상의 운명을 지난 인간에게 가죽은 고문이요, 짐의 무게를 감당할만큼 튼튼하지만 가벼운 패브릭이 내 팔자다. 가죽 백팩은 여러 번 사 봤고, 고스란히 당근마켓에 내놨다. 



왜 나는 티에리가 될 수 없을까. 

그건 나와 티에리가 완벽히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르니까, 다르게 일할 수 밖에. 


다른데 똑같이 일하면 안 된다. 


되지 않는다. 


큰일 난다. 



티에리와 킴(여기서의 내 닉네임이다)은 다른 정체성을 가졌다. 


정체성은 삶의 여러 요소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킴의 정체성(+성향)은 다음과 같다.


1) 외국인이다. 프랑스의 소도시, 한 공유오피스의 유일한 아시안이다. 이는 식사와 음료에 대한 취향이 다름은 물론, 노동시간도 다름을 의미한다. 전자와 후자  모두, 킴이 여러가지 물건을 사무실에 가지고 오거나 락커에 두어야 함을 의미한다. 
예: 농심 컵라면과 젓가락. 겨울에 필수. 김치 깍두기는 차마 못 먹음. 

예: 여름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필요. 아아에 필요한 강렬한 커피를 내릴 원두와 커피 프레스를 따로 사용한다. 사무실에 커피 머신이 있지만, 프랑스인들이 좋아하는 흐리고 밍밍하고 신 원두다. 


2) 생물학적 여성이다. 세상은 남성의 몸을 기준으로 디자인돼 있다. 예컨대 운전할 때 단신의 여성은 몸의 불편을 호소한다. 코로나 시대의 경우도 그렇다. 백신 접종 후 여성의 증상은 남성과 다르게 왔다. 유방이 붓거나, 생리주기가 흐트러지는 사례. 생리를 두 번, 또는 장기간 하는 경우들도 보고됐다. 그외 여러가지 자극에 여성의 몸은 더 예민하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이 비장애인 남성의 몸을 기준으로 디자인되어 있기 때문에. ("난 아닌데? 난 무던한데?" 싶으시다면 축하드린다) 


그러므로 킴은 몸을 돌보기 위한 여러가지 도구를 업무 시간 내내 사용한다. 망가진 몸을 돌보고, 앞으로 더 망가지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함이다. 

예: 생리대와 진통제, 요통과 거북목을 방지하기 위한 각종 도구들. 


3) 킴은 ADHD를 의심하고 있다. 충동성보다는 부주의가 심한, 그러나 '조용한' 타입이다. 반복작업을 극도로 괴로워하는 유형이다. 반복작업(예: 엑셀 작업, 모심기) 등을 할 때는 주위에 대통령이 있어도 무심코 콧노래를 부르는 타입. 일이 자신을 몰입시키는 종류가 아니라면, 남들보다 몇 배 더 고통스러워 한다. 


이런 타입은 부주의함과 산만함을 억제하고 때로는 숨기기 위한 노력을 24시간 내내 한다. 따라서 업무량에 상관없이 늘 스트레스를 받고 산다. 자기 자신과 싸우며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점을 극복하기 위한 도구들이 업무 시간 내내 필요하다. 즐겁지 않으면 도저히 일할 수 없기 때문에. 

관련 도구는 다음번에 정리해 보자. 너무 많기 때문에...


(반면 외모는 꽤 야무지게 생김. 아마도 숱많은 눈썹과 그닥 약하지 않은 안광 덕택일까)


4) 킴은 한국어로 일하는 지식노동자이다. 강의준비나 과제 첨삭을 할 때는 한국어로 된 책들을 참고자료로 쓴다. 작법서나 맞춤법 책, 글쓰기 에세이, 심리학 서적 중 특히 유용하고 내용이 훌륭한 것들은 절판된 것이 많다. 또한 전자책으로 나오지 못한 것도 많다. 


선박택배로 싣고 온 책 중에 극히 소량을 킴은 작업실 사물함에 둔다. 종이책 애호가들은 알겠지만, 종이책들을 이 책 저 책을 산만하게 뒤지다가 솔루션을 찾는 일이 흔하지 않은가? 전자책은 그러한 '유레카!'의 순간은 종이책에 비해 덜하다. 

예: 종이책 7권을 단번에 옮길 수 있게 에코백에 넣어서 내 자리로 이동.


5) 노마드 워커다. 줌이나 스카이프 미팅을 자주 한다. 역시 몇 가지 도구가 필요된다. 종종 돗자리를 들고 공원에 가서 줌 미팅을 한다. 


이유: 매일 매일 매일 온라인으로만 일하는 것은 너-무 지겹기 때문이다. 지겨움과 무료함에 유럽 중세도시답게 예쁜 공원을 얹으면? 그럭저럭 하루가 간다. 


6) (다시 한번 더) 외국인이다. 업무 전후로 영어와 불어를 공부한다. 

예: 불어공부시, 인강용 컴퓨터/필기용 아이패드/교재 필기용 펜과 형광펜/독서대/감시를 위한 캠스터디용 아이폰 모두 책상 위에 놓여야 함. 



이러한 이유로 킴은 사무실에서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 키가 160센티미터인 킴은 신체적으로는 가장 적은 공간을 차지하니, 물건들이 공간을 더 차지한다면 공평한 것이 아닐까. 


쓰다 보니 조금 질린다. 

독자들도 질릴까 염려되지만, 

이렇게 사는 나보다는 편안할 테니 마음 놓고

다음 회에 각 물건의 사용에 대해 길게 써보려한다.


챠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