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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Jun 26. 2018

모든 관계는 하나의 빛나는 세계

내가 힘없고 초라할 때도 만날 수 있는 사람 

며칠 전, 아주 맘 좋은 사람이 쿡 찌르는 말을 했다. 

“땡땡씨는 남자 고를 때 다른 건 다 봤는데 돈을 안 봤네.” 


대화의 맥락을 기억한다. 나를 무시하거나 비웃으려는 말은 아니었다. B가 한국에서 일할 수 있게 하려고 내 본업을 뒤로 하고 분주히 뛰어다니는 나를 염려해서 한 말이었으리라. 그는 B의 좋은 점들을 한참 나열하고 칭찬하다가 그 말을 했다. 다정이 지나쳐 오지랖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 그의 말을 점자처럼 더듬거렸다. 기분의 정체가 뭘까. 슬픔도 창피도 아니었다. 

“오해받고 있어." 

나는 틀린 것을 보면 불편해. 그 말이 틀려서 화가 난 거야. 항변을 해야겠다고 느꼈다.      


사랑을 고를 수가 있다고 믿나요?

운명을 선택할 수가 있다고 확신하나요?

말해줘요. 그냥 세상 사람들이 흔히 하는대로 흉내내어 말한 거라고. 

어른스러운 척 해 본 거라고.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때 주스를 고르듯 성분표를 읽지는 않는다. 요소 요소를 꼼꼼히 고려한 뒤 “오케이, 초이스!”하는 사람도 있나요. 내가 사람 운이 좋아서, 또는 사람 사귀기에 까다로워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평균점수가 가장 높은 상대를 골라 자신의 운명에 끼워 넣은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친구들에게 물었다. 너는 그 사람의 무엇이 가장 좋았어? 


H는 내가 그 질문을 할 때마다 웃는다. 매번 100%의 미소를 짓는다. 기억력 나쁜 내가 꽤 여러 번 물어보았을 텐데도. 그 표정을 그려서 불안할 때 부적처럼 꺼내 보고 싶을 정도로, 눈이 부시다. 평화롭다.  

    

“대화가 즐겁다는 것. 그전까지 연애는 몇 번 했지만 남자와 ‘그런’ 대화를 한 적은 없었어. 오빠를 처음 만났을 때 정말 놀랐어. 내 인생의 모든 이야기를 할 수가 있었어. 이렇게 대화가 즐거운 사람이라면 평생 함께 해도 좋을 것 같았어.”


맞아. 사랑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를 계속해서, 쉬지 않고 말해야 한다. 

‘좋은데는 이유가 없다’는 말은 너무 게으르잖아.       


늘 싱글거리는 Y는 내가 이 질문을 할 때마다 선생님처럼 진지해진다. 

“우리 곰돌이는 너무 편했어요. 잘났다는 사람도 많이 만나봤어요. 소개팅하고 네번까지 만난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데 끝내 편해지지 않더라고요. 아무래도 나다워지지가 않았어요.”      


H는 대화 요정이다. 불편한 사람과 만날 때마다 나는 종종 “나는 H다.”라는 세뇌를 한다. 그만큼 누구와도 부드럽게 대화를 이끈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Y는 누구와도 편해 보인다. 주변 사람들과 고루 모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섬에 가든 달에 가든 특유의 천도 복숭아 같은 웃음으로 뚝딱뚝딱 친구를 잘도 만든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사랑을 선택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가장 여리고 약한 부분을 의식한다. 세상의 공기가 모래바람처럼 느껴질 때,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이 서툰 외국어 같을 때, 갈피를 잡을 수 없어 그냥 누워서 스마트폰만 넘기고 있을 때. 내가 너무 못생긴 것 같아서 누구도 만날 수가 없을 때. 


그럴 때라도 편안하게 함께 있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하니까. 맑고 화창한 날에만 만날 수는 없으니까요. 사랑은 데이트와는 다르니까요. 


엄마도 친구도 모르는 내 영혼의 속살을 보듬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사랑, 한다고 느낀다. 그 대화는 자신에게 보완이 될 수도, 자극이 될 수도 있다. 일과 사람에 지친 나를 위로하는 대화일 수도, 타인의 감정을 잘 못 읽는 나를 돕는 대화일 수도, 금세 경직되고 마는 나를 와르르 풀어주는 대화일 수도 있다.      


하루에 인터뷰를 서너건 뚝딱 해낼 정도로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H는 자신의 감정선을 가만가만 짚어주는 결 고운 사람이 좋았을 것이다. 쿨하고 유능한 홍보우먼이지만 종종 지쳐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바닥에 드러눕는 Y는 아무런 대화 없이도 몇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쉼같은 사람이 좋았을 것이다. 


그런 건 ‘고르다’가 아니라 ‘끌리다’라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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