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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좋아하나요? 글쎄요.

ESsay #2

by 솔글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환경에 살고 있다. 여행을 갈 기회가 많은 곳에 살고 있다. 나에게 여행을 자주 가냐고 묻는다면 정말 많이 가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나에게 여행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글쎄...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솔직히 나는 여행이 좀 버겁고 부담스럽다. 왜냐하면,




1. 무계획을 추구하는 치밀한 계획형 인간

나는 하루를 몇십 조각으로 나누어 살고 있는 치밀한 계획형 인간이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여행만큼은 무계획이 간지 나는 것 같아서 언젠가부터 무계획으로 다니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계획만 안 세우고 계속 스트레스를 받는 모습이 꽤나 웃기다. 여행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계속 스트레스받고 발을 종종 구르며 불안해한다. 이럴 거면 계획을 세우면 될 것인데 이상한 포인트에서 게을러지는 것이 핵심. 수많은 이전 여행에서 날씨, 현지상황 이슈로 계획이 틀어졌을 때의 실망감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나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치밀한 계획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어쨌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속에 무계획 여행에 대한 스트레스로 버겁다.


2. 여유로운 여행에 대한 환상

여유로운 여행, 현지인처럼 사는 여행이 멋진 여행이라는 생각은 도대체 언제부터 하게 된 걸까. 일상에서 조차 여유를 가지는 방법을 모르는 내가 여행에 가서 갑자기 여유를 가지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잠자리가림' 이슈로 여행지만 가면 현지에 사는 것처럼 늦잠을 잘 수도 없고. 게다가 나는 그리 부자가 아니라 거금 들여 여행까지 와서 늘어지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덤이다.


3. 사진 찍기에 대한 딜레마

사진 찍는 게 중요한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으면서도 사진에 집착하고 싶지 않은데 사진을 안 찍고 지나가기엔 좀 아쉽고. 오늘의 내가 가장 젊은 날의 나라는데 이런 내 모습을 남기고 싶으면서도 사진 때문에 지체되고 늘어지는 여행을 보고 있자니 답답하다. 여행에서 사진이 주는 의미는 어떤 것인가. 사진조차 찍지 않으면 여행에서 남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그래서 어쨌든 나는 사진을 포기하지 못하는 여행을 다니고 있다.


4. 혼자 여행의 이유와 마주하는 외로움

혼자 하는 여행은 주로 두 가지의 경우에 떠난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이 없거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껴서. 그렇게 호기롭게 떠난 혼자의 여행은 1~2일 차까지 완전하게 해방된 극강의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3일 차부터 어마어마한 외로움이 몰려오는데 괜히 서러워 혼자 찔찔 울던 적도 여러 번이다. 누가 강요한 여행도 아니며 내가 선택한 길인데 왜 서러운 것인가 하며 스스로를 한심히 여길 때도 종종 있었다. 그럼에도 또 나는 혼자의 여행을 택할 때도 많다는 것이 함정.


5. 여행 단식원 오픈

아무거나 잘 먹는 줄 알았는데 꽤나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나는 여행만 가면 단식원을 오픈한다. 여행에서 중요한 요소인 미식을 잘 즐기지 못한다. 이번에 하노이를 다녀왔는데 하노이가 '음식은 호찌민보다 하노이다.'라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미식의 도시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하노이 여행에서도 현지음식을 단 한 끼도 먹지 않았다. 그나마 하노이 같은 대도시에 가면 대체할 수 있는 종류의 음식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오직 현지음식만이 존재하는 곳에서 다른 선택지마저 없을 때 깨작깨작 대며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여행을 다녀오면 살이 찐다던데 도통 그렇지 못하는... 입맛 까다로운 여행자.


6. 욕심 많은 여행자의 여행은 쉼이 아니다.

알면 알수록 보이는 게 많다던데 알면 알수록 하고 싶은 게 많아서 무리하게 되는 여행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딜레마. 지난 한 여행에서 여행지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서, 그래서 너무 많이 걸어서 새끼발가락 일시마비를 겪었다. 그 이후로 욕심 많은 내가 여행에선 뭐가 다르겠냐며 헛웃음이 나왔더랬다. 도대체 여행을 통해서 무엇을 그렇게 보고 얻어가고 싶기에 발가락이 아플 때까지 걷고 돌아다녔는가. 여행은 쉼인가. 배움인가. 열정을 불태우는 장치인가.



그럼에도 여행을 다시 떠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저런 툴툴대는 여행의 부작용에 대한 이야기들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떠날 것을 선택한다.

왜냐하면 여행을 통해 나를 발견하는 것이 참 흥미롭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부분에서 예민한지, 어떤 것은 괜찮은지, 또는 어떤 종류의 환경에서 편안한지, 사실은 혼자 있고 싶었던 건지 함께 있고 싶은 건지 등등에 대해 더 기민하게 느낄 수 있다. 평소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다양한 종류의 나의 감정에 마주하기도 한다.


특히 여행에서는 필연적으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많다. 여행지에서의 일정은 짧고, 짧은 시간 안에 나에게 충분히 행복한 경험을 주입해야 하는 과정을 겪는다. 어쩌면 그 과정이 여행, 그 자체이다. 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오게 될 수도 있는 여행지에서 내가 한 선택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충분하다. 그 선택에 집중해 보는 것은 나를 알아가는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끊임없이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탐구하는 존재이다. 나는 그런 고민이 어른이 되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알면 알 수록 너무나도 다채로운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 나는 10대보다 얼마나 나에 대해 더 알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런 어른이에게 여행은 10대에게는 없는 시간과 돈이 있으니, 나를 더 제대로 탐구하라는 기회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나를 위한 여행을 떠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여행이 가져다주는 나에 대한 탐구와 배움은 늘 새로워 자극적인 그런 것이다.




다음엔 또 어디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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