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지옥

사람을 지옥에서 꺼내오는 방법

by 은수

고지혈증 재검결과를 듣기 위해 병원에 갔다. 사람은 한산했지만 접수원들이 바쁜지 모두 전화통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번호표를 뽑아 들고 나를 호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깡마른 체구에 세상 모든 짐을 들고 있는 듯한 중년의 여자분이 병원에 들어섰다. 표정은 뭐랄까. 몹시 화가 난, 그러면서도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포에 질려 있는 상태였다. 잠시 머뭇 거리더니 전화를 하고 있는 직원을 향해 '진료예약되었는데요'라고 했다. 나도 같은 시간대 예약이었고, 다른 환자들도 대부분 예약일 텐데 번호표는 안 뽑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렇다고 뭐라고 할 엄두가 나지 않는 그이의 표정에 한마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지? 하는 표정의 수납원을 무시하고 그 사람은 'CT 사진 시디는 여기서 드리면 되나요?'라고 하더라. 아, 내과 병원이다 보니 초음파 검사에서 뭔가 의심되는 게 있어서 CT촬영을 해 오라고 했던 듯싶다. 분명 감별진단 리스트에는 평생 듣고 싶지 않았던 종양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었을 테고, 아마도 그 결과에 대해 듣기 위해 내원했을 테다. 그 사람의 무례와 표정이 이해가 갔다. 그렇게 이해하니 그분의 표정에 있던 화는 상황에 대한 부정이었고, 공포는 죽음에 대한 것이었으리라. 번호표를 받고 기다리는 나보다 먼저 진료실에 들어가는 힘없는 뒷모습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두려움일 게다. 어쩌면 삶의 끝단도 먼저 떠나 가시는 듯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무런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먼저 가려다 정말 먼저 가는 것보다 한숨 늦게 가는 게 축복인 것이니까.


한참을 지나서도 그분은 진료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결과를 듣고 울고 있어서 그럴까? 몇 해 전에 방영했던 드라마에서 유산하여 울고 있는 산모를 기다려주는 다른 산모들의 마음이 내 속에서도 피어났다. 측은지심과 함께 미묘한 안도감, 하지만 재검 결과를 기다리는 내 마음에도 조바심이 생기는 것은 나의 마지막 인간미일 게다. 내 차례를 기다리는 상대적인 시간압박을 줄이고자 책을 읽었다.


그리고 진료실의 문이 열렸다. 오색찬란한 꽃가루가 흩날리며 어떤 이가 문밖으로 나서고 있다. 걸음걸음이 춤추듯 경쾌했다. 죽음을 굴에 담았던 그 사람은 몇 분의 차이로 생명을 담고 나왔다. 아마도 정상이고 아무런 문제없다는 말들 들었던 게다. 숨기지 못하는 미소가 얼굴 가득 있었고, 낯빛과 배경까지 달라 보이는 게 신기했다. 아내에게는 우스개로 아내를 처음 봤을 때를 빼고 사람에게 후광이 있는 건 처음 본다고 말했다.


그분이 진료실에 들어갈 때는 분명 지옥이었을 게다. 적어도 진료실에서 나올 때는 천국은 아니더라도 지옥불구덩이에서 나오는 심경이었을 테다. 비록 내가 한 거라고는 그분에게 순서를, 양보 아닌 양보를 한 것뿐이지만 적어도 나의 기다림으로 한 사람을 지옥에서 단 몇 분이라도 꺼내놓은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 그 덕분은 아니겠지만 나의 재검 결과도 매우 깨끗하게 나왔다. 예상을 했던 결과였지만 그래도 그분의 지옥과 내 지옥이 깊이는 다를지언정 색깔은 같았음에 모두가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간 열심히 운동한 것과 몇 분의 여유를 부린 나 자신에게 참 잘했어요.라고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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