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밤 11시 퇴근이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나날이 투명해지고 있다. 회의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인 날 처음으로 손끝이 사라졌다. "아... 저기..."라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목소리를 죽인 날 손가락이 모두 사라졌다. 야근이 계속되는 동안 팔꿈치, 어깨, 그리고 이제는 목까지 보이지 않게 됐다. 긴 생머리를 하나로 묶은 채 검은 정장을 입은 내 모습이, 마치 비 오는 날 창문에 비친 그림자처럼 희미해져간다.
어쩌면 곧 완전히 투명해질지도 모른다. 이상하게도 무섭지는 않다. 오히려 이렇게 사라져버리는 게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투명인간에게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으니까.
감사 자료를 준비한 지 벌써 3주째다. 3년에 한 번 오는 이 폭풍의 한가운데서, 나는 매일 밤 복사기 앞에 선다. 복사기에서 쏟아지는 종이들이 하나둘 새가 되어 날아오른다. 그중 한 마리가 내 어깨에 앉는다. 복사기 토너 자국 같은 검은 무늬의 날개를 펄럭인다. 그것들은 내 머리 위를 맴돌다가 다시 복사기 안으로 들어가 평범한 서류가 된다. 아마도 나처럼 자신을 잃어가는 영혼들의 작은 일탈일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복사기 안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흰 종이처럼 하얀 양복을 입은 남자였다. 소매에는 복사기 토너 자국이 묻어있었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미쳐버린 걸까.
"안녕하세요, 저는 이전 담당자입니다."
"네? 이전...?"
"3년 전 감사 자료를 준비하다가 복사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버린... 결국 완전히 사라져버린 사람이죠"
남자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흐릿했다.
"당신도 점점 투명해지고 있군요. 저도 그랬어요. 처음엔 손가락이 안 보이더니, 나중엔... 제 목소리도, 제 생각도, 제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죠."
남자는 자신의 손을 들어보였다. 희미하게 복사기가 비쳐 보였다.
나는 무언가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남자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차가울 거라 생각했는데, 따뜻했다.
"선배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버텼냐고 궁금해하셨죠? 버티지 못했어요. 저는 끝내 제 자신을 잃어버렸으니까요."
남자는 내 컴퓨터 화면으로 다가가 녹아내리는 숫자들을 가만히 만졌다.
"하지만 당신은 달라질 수 있어요.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잖아요? 아직 당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조금 더 선명해진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팀장님 자리 앞에 섰다. 책상 앞에서 망설이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팀장님이었다. 평소엔 차가워 보이던 표정이 오늘따라 부드러웠다. 늘 바쁘게 지나치던 그 앞에서 나는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참았던 이야기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팀장님..." 목소리가 떨렸다. 입술을 깨물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요? 저만 이렇게 힘든 건가요? 자꾸... 자꾸 제가 안 보이는 것 같아요. 다른 선배들은 다 잘 하시는 것 같은데..."
팀장님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씀하셨다.
"나도 신입 때 똑같았어. 다들 잘하는 것 같고, 나만 뒤처지는 것 같고. 목소리를 내는 게 두려웠지. 근데 알고보니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더라고. 앞자리의 민지 씨도 작년에 똑같은 고민으로 찾아왔었어. 지금은 누구보다 잘 하고 있지만."
팀장님은 잠시 웃더니 계속 말씀하셨다.
"힘들 때 말하는 게 약한 게 아니야. 오히려 그게 더 용기있는 거지. 그동안 혼자 고민했을 텐데,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마워. 앞으로는 내가 좀 더 살펴볼게.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알았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더니, 팀장님 뒤 벽에 걸린 거울 속에서 내 모습이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거울 속에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야근하는 다른 팀원들, 업무에 치여 한숨 쉬던 선배들, 모두가 조금씩 투명해졌다가 다시 선명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밤 11시에 퇴근하지 않는다. 가끔은 야근을 하지만, 그때는 옆자리의 민지 언니가 함께 있다. "언니도 처음엔 그랬어. 이제 내가 도와줄 차례야"라며 웃는 언니의 목소리가 참 선명하다. 처음 들어왔을 때 툭툭 던지듯 말하던 그 목소리가, 이제는 이렇게 따뜻하게 들린다.
팀장님은 매주 한 번씩 팀원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을 만드셨다. 서로의 업무와 고민을 나누다 보면, 우리 모두가 조금씩 투명해졌다가 다시 선명해지는 과정을 겪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었던 거다.
복사기 소리는 여전히 휙휙 들린다. 때로는 종이가 새가 되어 날아오르고, 때로는 숫자들이 녹아내린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들이 두렵지 않다. 이제는 안다.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약한 게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그것이 더 큰 용기라는 것을. 나를 지우는 것보다, 나를 보여주는 것이 더 강한 것임을.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투명해질 수 있지만, 서로를 바라봐주는 한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