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모니터 위에서 커서가 규칙적으로 깜빡였다. 깜빡, 깜빡. 마치 심장 박동처럼. 이 하얀 화면은 끝없이 펼쳐진 소금 사막 같았다. 마감이라는 태양이 정수리를 뜨겁게 달궜다. 나는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이었다. 한 걸음 나아간 것 같아도 뒤돌아보면 모래바람에 발자국은 이미 지워져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사라지는
생각들을 겨우 붙잡아 소리 내 읽어보았다. "원시인들의 눈빛에는 현대인이 잃어버린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쓰레기였다. 한 문장마다 가면을 쓴 듯한 위선이 느껴졌다. 열 번째 쓴 첫 문단을 다시 지웠다. 단 한 문장도 살려둘 가치가 없었다. 삭제 키를 누를 때마다 작은 실패가 쌓여갔다.
"이게 최선인가?" 내 머릿속 비평가의 목소리는 항상 날카로웠다. 서재 벽면을 가득 채운 진화심리학 논문들이 나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수천 페이지의 학술적 분석이 있었지만, 그 어떤 문장도 내 손가락을 통해 생명을 얻지 못했다. 새벽까지 키보드를 붙잡고 있었지만 결국 그 끝은 빈 화면이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빈 문서 앞에 묶여 있었다. 교차로의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면서도 머릿속은 여전히 질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원시 인류는 어떻게 살았을까? 그들의 두려움, 욕망, 꿈은 어땠을까? 직접 경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세계를 그려내야 한다는 불가능한 도전 앞에서 좌절감이 밀려왔다.
그 때 땅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아스팔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뭐야...?"
주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균열은 순식간에 내 발 밑으로 확대되었다. 도로가 무너져 내리고, 내 몸이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손을 뻗어 잡을 것을 찾았지만, 이미 늦었다. 내 몸은 거대한 싱크홀로 빠져들었고, 주변의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암흑 속으로 추락하는 공포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 순간에 떠오른 생각은 '이게 좋은 소설 소재가 되겠는데'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떨어지는 느낌이 멈추고, 대신 물속에 떠 있는 듯한 감각이 찾아왔다. 가슴이 조여들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그때 모든 것이 하얗게 변했다. 눈앞에 섬광이 번쩍였다.
그리고 갑자기 바람 소리가 들렸다. 새 지저귐, 나뭇잎 스치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동물의 울음소리...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흙과 풀의 냄새.
마침내 눈을 떴을 때,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어지러움이 밀려왔다. 땅이 흔들리는 느낌. 내 몸이 아닌 듯한 감각.
낯선 얼굴들이 내 위로 몰려들었다. 두꺼운 눈썹과 돌출된 광대뼈, 그리고 야생의 눈빛이 그들의 얼굴을 지배하고 있었다.
"깨어났군."
누군가 말했다. 아니, 말이라기보다는 낮은 그르렁거림에 가까웠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팔을 들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피부는 햇볕에 그을려 있었고, 손톱 밑에는 검은 때가 끼어 있었다. 이 손이 내 것인지 낯설게 느껴졌다.
"여기가 어디죠?"
말을 하는 순간, 목소리가 낯설었다.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니, 내 목소리가 맞는데 억양이 달랐다.
주변을 둘러보니 돌로 만든 도구들과 동물 가죽, 그리고 불을 지피기 위한 흔적들이 보였다. 낯설고 오래된 것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모든 것이 어딘가 친숙하게 느껴졌다. 마치 수십 번 연구했던 논문 속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 것 같았다.
"이방인."
가장 키가 크고 근육질인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눈에는 권위가 서려 있었다. 그는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더니 부족원들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그러자 열 명 정도의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창을 겨누었다. 창끝이 내 목에 닿을 듯 가까웠다. 날카로운 돌로 만든 창끝에서 빛이 반사됐다.
"너는 누구지? 어느 부족에서 왔지?"
머릿속이 텅 비어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내 이름은 무엇인지조차 갑자기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이 물속에 잠긴 것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싱크홀이 내 기억마저 삼켜버린 것 같았다.
"저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저는 기억이 없어요. 어떻게 여기 왔는지 모르겠어요."
이마 깊숙한 곳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눈을 감자 희미한 이미지가 스쳐 지나갔다. 도시의 교차로. 균열. 싱크홀.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내 모습. 그러나 그 이미지는 구름처럼, 꿈처럼 빠르게 흩어졌다.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그의 체취가 강하게 느껴졌다. 흙과 땀, 그리고 동물의 냄새가 뒤섞인. '원시인의 페로몬'이란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위협적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감시해야 한다."
그는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 "네가 적이 아니길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목에 손가락을 그었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위협이 되면 죽는다.
두려움과 동시에 기이한 홀가분함이 찾아왔다. 지금은 그저 생존이 유일한 목표였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완벽한 글을 쓰려던 작가는 사라졌다. 이제 이곳에는 낯선 세계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한 인간만이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