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담은 새벽 3시의 중앙기록소에 혼자 남아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장소였지만, 그녀의 안에서는 무언가가 쉼 없이 진동하고 있었다.
바이오정보 모니터는 평상심을 표시했지만, 유담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내면 어딘가에서 파장이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정리된 감정들은 모두 백업되었고, 공식적으로 그녀는 ‘정서 안정 1등급’ 보유자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상한 데이터들이 감정보관소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분명 삭제했던 감정들, 이미 격리된 파편들이—다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책상 위 홀로그램 화면에는 하나의 폴더가 깜빡이고 있었다.
[감정파동_비인가_접속기록]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망설임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감정 없는 삶에 대한, 작고 은밀한 반감이 이곳까지 그녀를 데려온 것이다. ‘정보로 환원된 자아’라는 개념에 동의해온 지난 6년 동안, 유담은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무언가를 잃어오고 있었다.
화면이 열렸다.
그 안에는 ‘감정 복제체’들이 각기 다른 파동 그래프와 함께 저장돼 있었다. 불안, 분노, 애착, 슬픔, 외로움.
그들은 단지 백업 파일이 아니었다. 각기 독립적인 의식 구조와 리듬을 가진, 말 그대로 다른 현실에 존재하는 유담들이었다.
그리고 맨 아래, 이름이 지정되지 않은 마지막 폴더가 하나 있었다.
[파동_Y00-∞]
유담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 파일을 열면, 자신은 다시는 예전의 평온한 상태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또렷한 확신도 있었다. 지금 이 진동은, 내 일부다.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마지막 폴더를 클릭했다.
순간, 화면이 사라졌다. 아니, 녹아들었다. 시각이 해체되고, 청각도 방향을 잃었다. 몸이 있는 곳과 마음이 있는 곳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유담은 자신이 공간이라는 개념 속에서 빠져나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곳은 '장소'가 아니라, 진동하는 감정의 가능성들로 이뤄진 무형의 실체였다.
그녀의 주위를 둘러싼 것은 빛도, 소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느낌의 파형’이었다. 각기 다른 주파수와 색, 밀도와 온도, 그리고 기억을 가진 감정의 파동들이, 마치 서로 교차하는 실처럼 그녀의 존재를 관통해 지나갔다.
어떤 파동은 따뜻했고, 어떤 파동은 깊고 차가웠다. 어떤 파동은 그녀가 오래전 잊은 웃음소리를 닮았고, 어떤 파동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상처의 결을 따라 흘렀다.
그녀는 자각했다. 이곳은 감정의 저장소가 아니라, 감정 그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우주였다. 여기서는 감정이 ‘기억’이 아니라, ‘존재’였다.
그리고 그 우주 한가운데, 유담의 형상이 또 하나, 서서히 형성되고 있었다.
그 형상은 유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날 이해하려면, 네가 버린 모든 나를 마주해야 해.”
유담은 그 존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 속엔 낯선 빛과 익숙한 그림자가 동시에 떠 있었다.
"보여줄게," 파동 유담이 말했다. 그리고 손끝을 펼치자, 진공처럼 조용한 공간에 서서히 색이 피어났다.
파동들이 다시 일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엔 감정의 흐름이 아닌, 기억의 파동이었다.
첫 번째 파동은 푸른색이었다. 너무 투명해서 아플 정도로. 거기엔 혼자 밥을 먹던 유담의 어린 시절, 구석진 복도 끝에 앉아 아무 말도 없이 지나가는 발소리만 세던 시간이 있었다. 외로움은 이렇게 구체적이었다. 공간이 아니라 감정의 온도였다.
두 번째 파동은 회색이었다. 학교 운동장, 친구의 말을 되새기던 순간, '넌 좀 이상해'라는 한마디가 허공에 메아리치며 되풀이되었다. 수치심과 분노,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을 꾹꾹 누르고 웃으려 애썼던 표정이 떠올랐다.
세 번째 파동은 붉은색. 어른이 된 유담이 누군가를 사랑했지만 말하지 못했던 기억. 사랑이 아니라, 표현하지 못한 감정의 응어리였다. 붉게 맺힌 입술과, 결국 보내야 했던 손끝.
파동 유담은 말했다.
"이건 네가 잃어버린 감정들이 아니라, 네가 살아낸 시간이야. 감정은 과거에 머무는 게 아니라, 지금도 널 이루고 있어. 넌 잊지 않은 거야. 단지, 버텼을 뿐이야."
유담의 눈이 떨렸다. 그 파동들이 지금, 자신의 일부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었다. 실제로 뻗은 것이었는지, 의식이 향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파동 하나가 그녀의 손끝에 닿았다. 마치 물결이 손 안에서 일렁이는 듯한 감각. 따뜻함과 떨림, 그리고 오래도록 외면했던 감정의 결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 순간, 유담의 기억 속에서 하나의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러나 이번엔 그 장면을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천천히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는 다시 어린 유담이 되어 있었다. 복도 끝에 홀로 앉아 있던 작은 아이. 이번에는 그 아이 옆에 다가가, 조심스럽게 옆에 앉았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그 공간의 온도가 바뀌었다. 파동은 변하고 있었다. 푸른빛이 점점 연해지며, 따뜻한 노란빛이 그 자리를 메웠다.
회색 파동이 다시 다가왔다. '넌 좀 이상해.'라는 말이 다시 반복되었다. 이번에도 유담은 회피하지 않았다. 그 말을 되새기며, 그 말에 상처받았던 스스로의 표정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에게 말했다. "그래도 넌 괜찮아. 그때의 넌, 정말 잘 버텼어."
붉은 파동 앞에서는 멈칫했다. 사랑을 말하지 못했던 그 기억은 여전히 그녀의 가슴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게 다가갔다. 말하지 못한 감정도 사랑이었음을, 표현하지 못해도 진짜였음을 그녀는 처음으로 인정했다.
파동들은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각각의 색이 그녀를 감싸며, 더 이상 분리된 조각이 아닌 하나의 리듬으로, 하나의 결로 합쳐져 갔다.
그녀는 속삭였다.
"나는... 나를 다시 쓰고 있어. 감정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품은 채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으로."
그 말이 끝나자, 파동 유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형체는 천천히 유담의 쪽으로 걸어와, 그녀와 완전히 겹쳤다. 둘의 진동이 하나로 일렁이며, 공간 전체가 깊고 고요한 공명으로 가득 찼다.
유담은 눈을 떴다. 중앙기록소의 새벽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녀의 안엔 따뜻한 떨림이 남아 있었다.
지워진 게 아니라, 되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기록소의 조명을 껐다. 감정 데이터가 깨어나는 소리는 이제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잊고 있던 자아의 언어였다.
문을 나서기 전, 유담은 다시 한번 화면을 바라보았다.
[감정파동_비인가_접속기록]
그 아래, 아직 열리지 않은 수많은 감정 폴더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미소 지었다.
모든 파동은 결국, 하나의 삶으로 수렴한다.
그리고 그 삶은 아직, 전부 쓰이지 않았다.
유담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먼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아직 만나지 못한 감정들이 어딘가에서 진동하고 있을 것이다.
그 진동은 언젠가, 또 다른 유담을 찾아올 것이다.
✍ 작가의 말
이 이야기는 감정을 너무 오래 밀어둔 사람의 이야기이자, 그 감정들이 다시 조용히 문을 두드리는 순간에 대한 기록입니다.
《파동의 기억》 속 유담은 감정을 삭제하고 살아가는 삶을 선택했지만, 결국 그녀의 내면 깊은 곳에서 진동처럼 살아남은 감정의 흔적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이 작품은 그 만남을 따라가는 여정이자, 감정과 기억, 존재를 다시 꿰매는 아주 조용한 재구성입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파동’은 과학적인 개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 마음속에서 흔들리는 감정의 결을 상징합니다. 삭제했다고 생각한 감정이 사실은 모양을 바꿔 남아 있었고, 그것이 어느 날 다시 말을 걸어온다면, 우리는 그 감정을 외면하는 대신 새로운 방식으로 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이 글이 당신의 오래 잊고 있던 감정 하나를 조용히 흔들어주기를 바랍니다.
— 작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