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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가능성의 나

by 내면여행자 은쇼

상자를 열었을 때, 내 이름이 쓰인 책이 나왔다. 나는 그 책을, 단 한 번도 쓴 적이 없었다.

《무수한 가능성의 나》

표지는 생소했지만, 제목은 어딘가 낯익었다. 마치 오래전 꿈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라 작가님, 신간 축하드립니다." 편집자가 건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으며 나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카페 창밖으로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각자의 우산 아래 바쁘게 걸어갔다.

"고맙습니다." 내 입에서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책을 펼치자 프롤로그가 나를 맞이했다.

우리는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를 살아가고 있다. 내가 되지 않은 나도 어딘가에 존재한다.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그날 입을 다물었다면〉


비 내리는 파리의 카페. 유리창에 맺힌 빗방울 너머로 그의 실루엣이 보였다. 헤밍웨이가 앉았다던 그 자리에서, 나는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프랑스 남자를 만났다.


"앉아도 괜찮을까요?" 그가 내 테이블을 가리키며 물었다. 카페는 비를 피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물론이요." 나는 영어로 대답했다.

"한국에서 오셨군요?" 그의 영어는 프랑스 억양이 묻어났지만, 동양인의 얼굴을 알아본 눈매가 따뜻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요. 그리고..." 그는 내 옆에 놓인 책을 가리켰다. 한글로 된 제목이 보였다. "전 루브르에서 보안 책임자로 일하고 있어요. 마티외입니다."

우리는 밤새 이야기했다. 그는 한국 드라마를 좋아했고, 김치찌개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루브르의 뒷이야기를 들었다. 이별할 시간, 용기를 내려다 마음을 접었다. 그의 눈빛이 아쉬움으로 가득했지만, 나는 더 깊은 대화를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뿐이었다. 다음 날 나는 예정대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가끔 루브르 미술관 소식이 들려올 때면, 마티외를 떠올렸다. 한 번의 침묵이 지워버린 가능성의 세계. 그 모든 것이 다른 세계의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까?


한국으로 돌아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그저 보통의 삶이었다. 무난하게 안정적인. 하지만 새벽에 깨면 항상 파리의 비가 생각났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삶이 어딘가에서는 펼쳐지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려왔다.



〈틀 안에 머물렀다면〉


5년째 다니는 복지관은 안정적이었다. 매달 꾸준히 들어오는 월급, 4대 보험, 퇴직금. 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서류 작업과 행정 업무에 영혼이 조금씩 말라가는 느낌이었다. 내가 꿈꾸던 사회복지사의 모습은 이게 아니었다. 클라이언트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보다 보고서 작성에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있었다.


"아라 씨, 이번 달 사업 보고서 좀 다시 확인해주세요. 숫자가 안 맞네요." 팀장의 말에 한숨이 나왔다. 오늘도 야근이다. 창밖은 이미 어두워졌고, 약속한 친구에게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또 보냈다.

가끔 인스타그램에서 작가로 데뷔한 문예창작과 동기의 소식을 볼 때면 가슴 한편이 쓰렸다. 그녀는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곧 합리화했다. '저 길이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지. 나는 적어도 안정적인 월급이 있잖아.'


회색빛 사무실 창밖으로 똑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업무를, 내일도 오늘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할 것이다. 안전한 틀 안에서의 삶. 그러나 가끔 꿈에서는 내가 쓴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모습을 본다. 내가 되지 않은 나, 틀을 깨고 나갔을 그 나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서른이 코앞이다. 친구들은 하나둘 결혼했고, 부모님은 슬슬 내 결혼 이야기를 꺼낸다. 복지관에서도 이제 중간 관리자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니 좋겠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지만,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선택하지 않은 가능성들은 이제 흐릿한 그림자처럼 멀어졌다. 하지만 가끔, 그저 가끔은 '만약에'라는 세 글자가 가슴을 파고든다.

오늘도 침대 옆 서랍에 넣어둔 소설 원고를 꺼내 몇 줄 더했다. 아무도 읽지 않을 이야기. 그 속에서만큼은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던 세계, 내가 작가가 된 세계가 펼쳐진다.



〈틀을 깨고 나갔다면〉


4년 동안 준비한 사회복지사의 길을 포기하는 날, 동기들의 시선은 반은 부러움, 반은 걱정이었다. 부모님은 처음에 크게 반대했고, 한 달 치 월세만 지원해 주겠다고 했다.


원룸 보증금을 빼서 생활비로 쓰는 동안, 소설은 열 번이나 거절당했다. 편의점 알바,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끼니를 때웠다. 밤에는 졸린 눈을 비비며 글을 썼다. 동기들이 복지관에 취직해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소식에 가끔은 흔들렸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걸까?' 라는 의심이 매일 밤 찾아왔다.


"이거, 정말 재미있네요. 출판해보고 싶어요." 1년 만에 찾아온 첫 긍정적인 답변이었다. 소설은 출간 두 달 만에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평행우주 속 내가 살지 않은 삶들'이라는 주제는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틀에 갇히지 않는 상상력, 28세 여성 작가의 과감한 도전이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아라 작가님의 소설 덕분에 용기를 얻었어요. 저도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해보려고요." 한 독자의 메시지에 가슴이 뭉클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단지 나 자신의 틀을 깬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가능성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작은 선택이 나를 바꾸었고, 그것은 다시 주변을 바꾸고 있었다. 내가 쓴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나도 선택의 갈림길에서 용기를 냈고, 그것이 내 현실이 되었다.



〈그날 용기를 냈다면〉


비 내리는 파리의 카페. 유리창에 맺힌 빗방울 너머로 마티외의 실루엣이 보였다. 헤밍웨이가 앉았다던 그 자리에서,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했다.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나는 시계를 보며 말했다.

마티외의 눈에 아쉬움이 스쳤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그를 못 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용기를 냈다.


"혹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제가 파리에 더 머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7년이 흘렀다. 몽마르트르 언덕의 작은 아파트에서 우리는 세 살배기 딸과 함께 살고 있고, 나는 프랑스어로 SF 소설을 쓰고 있다. 한국을 떠나는 결정이 이토록 다른 삶으로 이어질 줄 몰랐다. 작은 용기, 짧은 순간의 선택이 내 인생의 모든 궤적을 바꾸어놓았다.



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었다. 한 순간의 작은 선택이 만들어낸 무수한 가능성의 세계였다. 내가 살지 않은 모든 삶들의 파노라마. 하나의 나비효과가 만들어낸 평행우주들.


마지막 장을 넘기자, 아래 문장이 적혀 있었다.

"작은 선택이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손가락으로 문장을 쓸어내렸다. 잉크가 번지지 않았다. 마치 다른 차원에서 온 메시지처럼, 단단하게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책을 내려다보았다. 표지에는 분명 내 이름, '김아라'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작가 사진이 있었다. 그것은 분명 내 얼굴이었지만, 어딘가 달랐다. 더 자신감 있어 보이는 눈빛, 조금 더 날카로운 윤곽. 내가 아닌 나의 모습.


휴대폰을 꺼내 검색창에 내 이름을 입력했다. 그리고 '소설가'를 덧붙였다.

검색 결과가 뜨자 나는 숨을 멈췄다.

'김아라 작가 신작 《무수한 가능성의 나》 베스트셀러 등극... 양자역학을 접목한 SF 세계관 호평'


화면 속 인터뷰에서 '나'는 말하고 있었다.

"이 소설은 제가 소설가가 되기로 결정했던 그 순간,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천천히 책을 덮었다. 그리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가 그치고 있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내가 지금 읽은 이 책은 어느 세계에서 온 것일까? 이 책을 쓴 '나'는 어떤 선택을 했기에 작가가 되었을까? 그리고 그 '나'는 지금, 다른 세계의 '나'가 이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휴대폰을 다시 들어 메모장을 열었다. 오래전부터 써오던 소설의 첫 문장을 수정했다.

'상자를 열었을 때, 내 이름이 쓰인 책이 나왔다. 나는 그 책을, 단 한 번도 쓴 적이 없었다.'


어쩌면 모든 선택은 이미 다른 세계에서 이루어졌는지도 모른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삶은 이미 다른 나에 의해 살아지고 있을지도. 그리고 그 무한한 평행세계들이 가끔은 서로를 엿보는 것일지도.


나는 카페를 나서며 생각했다. 오늘 내가 내릴 선택이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의 내가 또 다른 선택을 할 것이다. 무한히 갈라지는 삶의 가능성들. 그 모든 가능성 속에서,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선택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사이로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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