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도약
"마지막 기회입니다. 지금이라도 철회하실 수 있어요." 닥터 김의 목소리는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미묘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그는 안경 뒤 눈동자가 내 얼굴을 살폈다.
실험 동의서가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이 한 장의 종이가 내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왔다. 펜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예전에는 이 손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지금은 이야기가 내 손을 버렸다.
석 달 전, 열 번째 거절 메일을 받은 날이었다. '안타깝게도 귀하의 원고는 당사의 출판 방향과 맞지 않습니다.' 형식적인 문구 뒤에 숨겨진 메시지는 분명했다. 소설가로서의 내 정체성은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었다. 텅 빈 화면을 밤새 노려보던 날들. 마감일이 다가오는데 써내려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문장이, 모든 단어가 완벽히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내 손가락을 묶어두었다.
지하철의 형광등 빛이 피로한 눈을 찌르고, 손잡이를 붙잡은 손가락은 하얗게 변할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 꿈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귓가에 울리던 그때, 출입문 위 광고판에 시선이 닿았다.
진화적 기억 접근(Evolutionary Memory Access, EMA) 실험 참가자 모집.
DNA에 잠들어 있는 5만 년 전 기억을 깨우세요.
그 문구는 창작의 막다른 골목에 선 내게 기적처럼 다가왔다. 어쩌면 이것이 내 막힌 상상력을 해방시켜 줄 열쇠일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희망.
나는 실험 동의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빨간색으로 강조된 경고문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현실과 시뮬레이션의 경계가 불분명해질 수 있음...''...72시간 이상 지속 시 뇌 기능에 영구적 손상 가능성...''...진화적 기억 접근은 비가역적 인지 변화를 초래할 수 있음...'
광고판의 희망찬 문구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대신 '영구적 손상'이라는 단어가 뇌리를 파고들었다. 서명란 위에서 펜끝이 머뭇거렸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지만 그대로 포기한다면? 다시 그 하얀 화면 앞에 앉아, 깜빡이는 커서만 지켜봐야 한다면? 그 소금 사막 같은 백지 위를 아무리 걸어도, 발자국은 남지 않을 것이다.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었다. 영원한 정체와 위험한 도약.
연구실의 형광등 빛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벽에 걸린 초기 인류의 동굴 벽화 사진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원시 인류가 그린 사냥 장면. 그 속에 담긴 원초적 에너지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결정했습니다," 내 목소리가 흔들렸다. 이어서 서명을 마쳤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
차가운 금속 침대 위에 몸을 맡겼다. 피실험자용 가운이 얇게 느껴졌다. 간호사가 팔에 센서를 부착하는 동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생소한 기계들이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뇌파 모니터에는 내 불안한 정신 상태가 요동치는 선으로 나타났다.
"먼저 약물을 투여하겠습니다," 닥터 김이 말했다.
간호사가 내 팔에 정맥 주사를 준비했다. 투명한 액체가 담긴 주사기를 보며 불안감이 커졌다.
"이 약물은 뭐죠?" 내가 주사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현재의 의식을 억제하는 신경 차단제입니다," 닥터 김이 설명했다. "일종의 통제된 최면 상태로 들어가게 해주죠. 현재의 자아가 일시적으로 잠들면,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어요."
주사 바늘이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찌릿함이 느껴졌다. 액체가 혈관으로 주입되는 순간 쇳맛 같은 금속성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서늘한 한기가 주입 지점에서 시작해 혈관을 타고 팔꿈치, 어깨, 그리고 가슴까지 천천히 퍼져나갔다. 마치 얼음물이 내 혈관을 채우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약물이 퍼져가는 동안 나른함이 밀려왔다. 목소리가 간신히 나왔다. "다음은... 어떤 단계인가요?"
닥터 김이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준비된 장치를 가리켰다. "이제 이것을 사용할 차례입니다."
조수가 무거워 보이는 기계를 가져왔다. 복잡한 회로와 전극이 달린 헬멧이었다.
"경두개 자기자극기예요," 닥터 김이 헬멧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TMS라고도 하죠. 이 장치가 해마와 편도체를 정밀하게 자극해 평소에는 접근할 수 없는 진화적 기억을 활성화시킬 겁니다."
"마치... 잠자는 유전자를 깨우는 거군요," 내가 말했다.
"정확합니다. 우리 DNA에는 조상들의 기억이 코드화되어 있어요. 약물로 현재의 의식이 억제된 상태에서 TMS가 작용하면, 당신은 5만 년 전 원시 인류의 삶을 직접 경험하게 될 거예요.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DNA에 각인된 실제 기억에 접근하는 것이죠."
약물이 혈관을 타고 퍼져나갔다. 천장이 물결처럼 일렁이기 시작했고, 소리는 깊은 터널 끝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왜곡되었다. 닥터 김이 헬멧을 내 머리에 씌울 때, 차가운 금속이 두피에 닿는 느낌만큼은 선명했다. 실험용 의자가 뒤로 기울어지며 내 시야가 하얀 천장으로 가득 찼다.
엄마의 얼굴, 미완성 원고, 책장의 소설... 소중한 기억들이 눈앞에서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이대로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지?
모니터 앞의 조수가 닥터 김에게 속삭이는 순간, 그들의 긴장된 표정이 형광등 불빛처럼 또렷하게 빛났다. 입을 열어 질문하려 했지만, 혀는 납덩이처럼 무거웠고 목구멍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음만 새어나왔다.
"괜찮습니다, 아라 씨," 닥터 김의 목소리가 물속에서 울리는 것처럼 들려왔다. 어둠과 빛 사이 어딘가에 갇힌 채, 모든 것이 슬로모션으로 움직이는 듯했다.
조수의 말이 깨진 라디오 신호처럼 끊겼다. "...뇌파 패턴이... 범위를 벗어나... 프로토콜에 따르면..."
"...이 데이터는 너무 귀중해... 계속 진행..." 닥터 김의 단호한 목소리.
갑자기 알람 소리가 귀를 찢었다. 붉은 빛이 실험실을 채웠다. 주변의 색채, 소리, 냄새까지—모두 비현실적으로 선명하게 증폭되었다가 갑자기 소멸했다.
"...안전 범위 초과... 신경 회로 불안정..." 여성의 목소리.
"...안정제 15% 증량... 프로토콜대로 완료..." 닥터 김의 대답.
"3..."
이거 '통제된 안전한 환경'이라고 했잖아요! 마음속으로 외쳤지만, 현실에서는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2..."
천장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현실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내 의식은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1..."
이게 아닌데... 의식이 안개처럼 흩어지며 마지막 생각이 떠올랐다. 돌아가고 싶어...
그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톡' 하고 튕기는 느낌이 들었다. 온몸이 가벼워졌다. 마치 물속에 떠 있는 것처럼. 눈을 떠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대신 다른 소리들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새 지저귐, 나뭇잎 스치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동물의 울음소리...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흙과 풀의 냄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이곳이 어디인지,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기억은 점점 희미해졌다. 남은 것은 오직 불안감뿐. 어쩌면 이곳이 현실이고, 이전 삶은 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갔다.